[특파원 칼럼/김창원]간 총리의 ‘제3의 길’ 실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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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6월 2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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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5월 토니 블레어 영국 노동당 당수가 18년 만에 정권교체를 이루고 총리에 취임했을 무렵이다. 당시 서유럽에는 블레어 총리의 정치이념인 ‘제3의 길’이 들불처럼 퍼져나갔다. 제3의 길을 이론화한 것은 사회학자이자 블레어 총리의 정책 브레인이었던 앤서니 기든스였다. 그는 ‘요람에서 무덤까지’로 상징되는 전후 유럽의 복지국가체제(사회민주주의)인 ‘제1의 길’과 1979년 이후 대처리즘으로 불리는 신자유주의인 ‘제2의 길’을 모두 부정하고 그 대안으로 제3의 길을 제시했다.

기든스 이론의 사회적 배경이 됐던 1980년대 유럽은 정부가 개인의 역할까지 대신해 주는 사민주의로 비효율과 저성장의 폐해를 낳았고 이에 따라 신자유주의가 득세했다. 하지만 신자유주의를 택한 국가들 역시 높은 실업률과 사회적 불평등 심화로 몸살을 앓았다.

기든스는 국가의 실패로 귀결된 전통적 사민주의에 대해 시장의 효율성을 요구했다. 또 사회를 ‘비인간적인 정글’로 만들어버린 신자유주의에 대해서는 사회적 평등과 제한적 시장경제를 제안했다. 국가가 개입해 삶의 질을 보장하되 시장효율의 장점을 살리자는 절충형 대안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기든스의 제3의 길은 시장의 효율성에 무게를 둔 유럽형 복지국가체제의 수정판에 가까웠다. 그가 민영화와 탈규제라는 신자유주의 기본 틀을 수용해 우경화됐다는 비판을 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4일 취임한 간 나오토(菅直人) 일본 총리도 ‘제3의 길’을 슬로건으로 내걸었다. 간 총리 역시 이전의 두 갈래 길을 부정하는 데서 출발했다. 일본판 제1의 길은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 전 총리의 ‘일본열도개조론’으로 상징되는 공공투자형 성장정책이다. 일본은 1970년대 초 도로나 댐 등 공공사업에 막대한 재정을 투입해 고도경제성장을 이뤘지만 사회적 수요와 동떨어진 무분별한 정부 사업은 심각한 재정적자를 낳았다. 2001년 취임한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는 이 같은 정부의 비효율을 ‘일본병’으로 규정하고 탈규제와 민영화, 작은 정부를 표방하며 대대적 구조개혁을 실시했다. 그러나 고이즈미의 제2의 길 역시 고용불안과 계층 간 격차를 심화시켰다.

간 총리의 제3의 길은 ‘현명한 정부’를 강조한다. 정부가 세금을 많이 거두더라도 제대로 투자하기만 하면 고용과 소비가 늘어나는 경제선순환을 만들 수 있다는 논리다. 간 총리는 현명한 지출의 예로 고령자 의료, 노인복지서비스, 기초연금 등을 들었다. 소비세와 소득세 인상 등 대대적인 세제 개편을 통해 확보한 재원을 사회보장 지출에 쏟아 붓겠다는 것이다. 시장의 효율성보다 큰 정부의 역할을 고집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일본 사회 내에서는 간 총리의 제3의 길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도 만만치 않다. 정부가 돈의 용처를 결정하는 주체가 되는 데 대한 못마땅함이다. ‘소비로 끝날 뿐 사회자본으로 축적되지 않는 의료나 복지서비스’는 규제를 풀어 민간에 맡기는 게 성장에 이롭다는 지적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20년 장기불황을 낳은 장본인은 무능한 정부였다는 불신감이 짙게 배어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일본판 제3의 길은 성공할 수 있을까. 10여 년 전 유럽의 제3의 길이 시장의 파고에 흔적도 없이 사라진 전례를 보면 전망은 그리 밝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1998년 외환위기 이후 계층 간 격차가 심화되고, 인구고령화 등 비슷한 사회적 과제를 안고 있는 한국으로서는 일본의 새로운 실험을 눈여겨보지 않을 수 없다.

김창원 도쿄 특파원 chang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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