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2002년 6·29를 반성하며 2010년 3·26을 기억하자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4월 28일 03시 00분


평택 제2함대사령부에 마련된 천안함 46용사 합동분향소에는 이틀째 비가 내렸다. 하늘도 어둑한 빛으로 내려앉았다. 분향소에서 절도 있게 조의를 표하는 군인들의 모습에선 육·해·공군이 따로 없었다. 장병들의 얼굴엔 하나같이 비통한 표정이 가득했다. 조문을 마치고 돌아가는 여야 정치인들도 “장병들의 고귀한 희생을 헛되지 않도록 하겠다”고 방명록을 썼다. 2함대사령부 관계자는 “2002년 2차 연평해전 때와 격세지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서울광장에서도 이명박 대통령을 비롯해 각계 인사와 시민들이 추모행렬에 자발적으로 참여해 천안함 장병들의 순국을 애도했다.

2002년 6월 29일에는 서해 북방한계선(NLL)을 3마일이나 침범한 북한 경비정이 우리 해군 고속정 357호를 선제공격해 윤영하 소령과 한상국 중사, 조천형 중사, 황도현 중사, 서후원 중사, 박동혁 병장 등 6명이 전사했다. 영결식장에는 김대중 당시 대통령도, 김동신 국방장관과 이남신 합참의장도 없었다. 김 대통령은 참사 발생 다음 날 일본에서 열린 한일 월드컵 폐막식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공항으로 가면서 5분 거리의 국군수도병원에 있는 장례식장에 들르지 않았다.

햇볕정책을 금과옥조로 삼은 당시 작전지침은 북한 해군의 NLL 침범에 대해서도 먼저 발포하지 말고 몸싸움으로 밀어내는 ‘차단기동’을 원칙으로 했다. 사실상 손발이 묶여버린 우리 해군은 적의 선제공격에 무방비로 노출된 상태에서 기습을 당한 셈이다. 정부의 무관심 속에 치러진 장례식 이후 고(故) 한상국 중사의 부인 김종선 씨는 고국을 등지고 미국으로 떠났다가 3년 만인 2008년 4월 귀국했다.

천안함 사건은 대한민국 안보가 마비되다시피 했던 과거 정권 10년의 후유증이 얼마나 큰 것인지 새삼 일깨워주고 있다. 우리 사회의 일각은 아직도 햇볕정책의 주술(呪術)에서 완전히 깨어나지 못했다. 2차 연평해전은 2002년 월드컵 4강 진출이라는 욱일승천(旭日昇天)의 분위기를 비웃듯 도발한 것이었다. 천안함 사태는 원전 수출과 겨울올림픽 5위 달성,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유치로 들떠 있던 대한민국의 옆구리에 비수를 꽂은 격이다. 이명박 정부는 출범 후 경제 살리기에 나서 성과를 거두었지만 안보는 상대적으로 소홀히 다룬 느낌이 없지 않다. ‘전략공군’ ‘대양해군’처럼 구호만 화려했지 지난해 대청해전 패배 이후 절치부심한 북한에 대한 대비가 탄탄하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2010년 4월의 범국민적 추도물결 속에 우리가 분명히 깨달아야 할 3·26사태의 교훈은 국가안보는 한 치의 방심도 허용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확고한 안보체계를 구축하는 것만이 천안함 영령들의 희생을 헛되이 하지 않는 길이다. 안보가 흔들리면 한꺼번에 모든 것이 무너지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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