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조성하]금메달보다 빛나는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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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3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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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급한 성정은 산에서도 어김없이 드러난다. 산길에만 들어서면 누구랄 것 없이 정상을 향해 돌진하듯 내뺀다. 그 이유, 누가 지적하지 않아도 우리 모두가 다 안다. 뒤처짐이 곧 패배라는, 태어나면서부터 체득한 무한경쟁 의식 때문이다. 그게 밴쿠버 겨울올림픽에서 우리가 거둔 놀라운 성과의 뒷받침이었음은 물론이다. ‘노 금메달’의 일본을 보며 그 치열한 경쟁의식에 숨겨진 가공할 위력을 다시 한번 실감한다.

하지만 걱정도 앞선다. ‘과(過)하면 쇠(衰)한다’는 선현의 가르침이 두려워서다. 올림픽에서 금메달의 의미는 절대적이다. 강자만이 살아남는 만고불변의, 약육강식이라는 절대 변치 않을 자연법칙에 가장 부합된 진리의 총아여서다. 하지만 본래 올림픽 정신은 그게 아니지 않은가 말이다.

피에르 쿠베르탱의 주창으로 첫 근대 올림픽이 열린 곳은 1896년 그리스 아테네였다. 당시 올림픽은 지금 같은 ‘겨루기’가 전부는 아니었다. 참가 자체에 의미를 두고 있었다. 스포츠를 통해 신체를 단련하고 그런 건강한 신체에 깃든 건전한 정신으로 세상을 바꾸자는 캠페인이었다. 세상 모든 젊은이가 평화로운 세상을 향해 함께 어깨 걸고 나아가자는.

그렇다. 평화란 ‘함께 하는 것’이다. 쿠베르탱은 그걸 스포츠를 통해 구현하고자 한 선각자였다. 그의 일흔일곱 생을 보자. 열강의 탐욕이 극에 치달은 식민지쟁탈전 최정점의 시기였다. 태어난 1860년은 영국·프랑스가 중국과 베이징조약을 체결한 해고 타계한 1937년은 제2차 세계대전(1939∼1945년)의 전운이 짙게 드리운 어둠의 시대였다.

그만큼 평화는 절실했고 때마침 발굴된 고대올림픽 유적은 그에게 스포츠가 솔루션임을 가르쳐 주었다. 그의 주창에 따라 열린 근대올림픽은 ‘평화 컨벤션’이었다. ‘우승’보다는 ‘참가’에 더 큰 의미가 있었던 것은 그런 정신과 의의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메달리스트에게만 환호한다. 평화니 참가니 하는 정신과 의의는 구멍 난 양말처럼 내팽개쳐진 지 오래다.

지금 우리는 또 다른 ‘금메달레이스’를 관전하고 있다. 알피니스트 오은선 대장의 안나푸르나 봉 등정이다. ‘여성 세계 최초’라는 대기록을 향한 각축이 치열한 ‘히말라야 8000m급 14좌 완등’ 레이스의 마지막 승부인 만큼 기대도 크다. 하지만 그 전에 물을 것이 있다. 그녀의 14좌 완등이 그녀에게 과연 어떤 의미가 될지를.

그 답을 나는 에베레스트 초등자 에드먼드 힐러리 경에게서 구한다. ‘세계 최고봉 초등’은 당시 대관식을 앞둔 대영제국의 엘리자베스 2세 여왕에게 큰 선물이었다. 본인에게도 작위수여라는 큰 영광이 돌아갔다. 하지만 그는 생애를 영광 속에 가두지 않았다. 그 허상에 묻히지 않고 오히려 최고봉 등정을 통해 배운 가르침을 따라 살았다.

그것은 봉사와 우정이었다. 히말라야 트러스트(자연보호기구)를 구성해 에베레스트 산의 등반 쓰레기를 치웠다. 또 자기 대신 초등의 영광을 안을 수 있었음에도 지쳐 쓰러진 자신을 정상에 서도록 도운 셰르파 텐징 노르가이를 평생친구로 삼고 그의 고향 네팔에서 병원과 학교를 짓고 봉사하며 살았다.

금메달과 대기록, 모두 중요하다. 하지만 힐러리 경은 그 의미에 더 큰 가치를 두었다. 그 가치는 영광을 행동으로 구현할 때 비로소 드러난다. 대기록을 통해 배운 것이 없다면 그 기록은 무의미하다. 모든 올림픽 메달리스트와 오은선 대장에게 이 글을 바친다.

조성하 여행전문기자 summ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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