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박성희]갈등 요리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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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2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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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작부터 낌새가 이상했다. 물을 넉넉히 넣어도 밥알이 고들고들하더니 김이 푹푹 새어나가고 급기야 밥물이 솥 주변을 타고 뚝뚝 떨어지는 것이다. 밥할 때마다 허옇게 말라붙은 밥물 자국을 지워내며 10년 넘게 써온 전기압력밥솥을 이제 ‘개비’해야 될 때가 왔음을 알았다. 지난 몇 년 부서진 손잡이를 교체하고(치료) 흠집 난 내(內)솥도 바꾸면서(장기교체) 생명연장을 꿈꿔보았지만 세월 앞에 장사가 없기는 전자제품도 매한가지인 모양이다. 미끈한 디자인의 새 밥솥으로 밥을 하며 모처럼 구수한 ‘밥 냄새’를 맡았다.

압력밥솥의 생로병사를 목도하며, 어지럽게 갈등을 분출하는 우리 사회가 흡사 성능 떨어지는 밥솥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다양하고 평등한 인간이 무리를 이루어 사는 세상에서 갈등은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압력이 밥맛을 좋게 하듯 갈등을 잘 다스리면 사회발전과 통합을 이끄는 동력이 된다. 반면 엉뚱하게 새어나간 열기와 압력은 작업의 효율성을 떨어뜨릴 뿐 아니라 주변을 더럽히고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선진국의 조건으로 여러 덕목을 거론하지만 그중 사회갈등과 압력을 견뎌내고 구성원의 합의를 이끌어내는 능력이 으뜸 덕목이 아닌가 한다.

갈등에 대처하는 방식으로는 회피, 제압, 설득과 타협이 있다. 가장 바람직한 조리법은 말과 글을 통한 상호 이해, 즉 설득과 타협이다. 법정으로 가는 것은 갈등과 씨름하다 지친 사람들이 최후로 택하는 수단이다. 최근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미국산 쇠고기 광우병 관련 PD수첩 무죄 판결은 우리 사회 갈등 해결 방식이 미숙함을 드러내는 사건이다. 보도의 편향성과 진위를 건전한 상식이나 언론의 전문성이 아닌 민·형사 재판부에 의존해 가려야 하는 사정은 딱하다. 복잡한 사건이 경직된 사법체제와 만나 빚어지는 사태는 그 다음 문제다.

‘타협 대신 소송’ 덜 익은 해소책

소송 일변도의 분쟁해결을 선호하는 우리나라는 소송 건수만 봐도 이웃 일본의 5배(인구대비)에 달한다고 한다. 조정건수를 보면 일본의 경우 소송건수의 15%를 차지하는 데 비해 우리나라는 0.7%에 불과하다고 한다. 미국의 경우 협상으로 형량을 조정하는 사전형량조정제도(plea bargain)를 통해 해결되는 사건이 95%에 이른다. 관 주도형 분쟁해결을 선호하고 타협보다 응징을 목적으로 하는 풍토가 개선되지 않는 한, 우리 사회 갈등은 소모적으로 증폭될 것이 불 보듯 뻔하다.

다양한 이해관계를 대변하고 조정해야 하는 국회야말로 생산적인 토론과 갈등 해결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불행히도 우리 국회는 논쟁에 서툰 것 같다. 논쟁이란 증거를 수반한 주장이다. 증거끼리 부딪치도록 하고 사람은 다치지 않게 하는 것이 게임의 룰이다. 그런데 우리 국회에서는 주로 사람끼리 부딪치고, 주장이 곧잘 난무한다. 세종시 논란도 예외가 아니다. 정부의 수정안을 진지하게 받아들여 논리적으로 반박하기보다 통째로 철회할 것을 주장하고 입장이 다르다는 이유로 토론을 거부하고 그걸 바라보며 집안싸움이라고 손가락질 하는 장면이 모여 갈등 요리 기능을 상실한 낡은 밥솥의 모자이크를 완성한다. 그 안에서 서로 이기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실상은 모두 지는 게임을 하는 셈이다.

일상에서 사소한 갈등을 피하는 것은 현명한 일일지 몰라도, 적극적으로 갈등을 풀어가야 하는 국회가 갈등에 냉소하거나 비아냥거려서는 안 된다. 갈등은 부정적인 것이며 가급적 피해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고 매일 밥하듯 요리해 국민이 먹을 수 있게 내놔야 한다. 핵심 조리 기술은 토론과 설득이다. 진지하고 진득하게 토론해야 한다. 여기서 토론이란 ‘자기 논리의 강변’이 아니라 ‘상대방 논리에 대한 논리적 반박’이 출발점이다. 그러자면 상대방을 인정하고 이야기를 경청할 줄 아는 것이 기본이다. 필요하면 타협하는 유연성을 가져야 한다. 우리보다 먼저 의회민주주의 전통을 세운 나라에서 개발된 토론의 기술을 학습하고, 다양한 갈등 상황에 대한 해결방식을 모아 우리 상황에 적용해 가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견 다듬어 상차리는 게 국회 일

미국의 경제학자 케네스 볼딩은 ‘갈등과 방어’라는 저서에서 옛날에는 경기침체를 허리케인 같은 천재지변으로 여겼으나 지금은 그에 대한 처방과 예방이 가능하게 되었다며 갈등 역시 얼마든지 조절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갈등 상황을 미리 알고 대처했더라면 세계대전도 막을 수 있었다는 것이 그의 논리다. 갈등은 깊어지기 전에 초반에 알아내는 편이 좋고, 갈등의 전선에 있는 논리들을 파악한 후, 알맞은 크기로 잘라서 공격해야 한다고 그는 일러준다.

갈등을 잘 요리하면 몸에 좋지만, 섣불리 다루다간 음식 전체를 버리게 된다. 아예 외면했다간 갈등에게 오히려 먹힐 수도 있다. 갈등 요리법을 반드시 알아야 하는 이유다.

박성희 이화여대 언론홍보영상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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