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최영훈]바보야, 문제는 내신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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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2월 2일 20시 1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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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이 응시한 대학에서 불합격 통보가 왔다. 국립인 이 대학은 지원한 다른 대학 2곳에 비해 내신반영 비율이 높다. 아들의 내신은 중간 이하에 속한다. 휴학 중인 반수생이라 겁 없이 지원했는데 다행히 2배수엔 들었다. 그러나 논술시험이 끝난 뒤 물어보니 내신 수능 논술을 고르게 반영한다고 했다. 내신이 결정적인데도 ‘혹시나…’ 기대를 건 게 민망했다.

실용-국격 고루 높은 외치 성적표

이명박 대통령의 외교무대 공적은 눈부시다. ‘실사구시 외교’라는 칭찬을 할 만하다. 하이라이트는 400억 달러에 이르는 아랍에미리트의 원전 프로젝트를 따낸 거다. 세일즈맨 대통령의 진면목을 보여줬다. 그렇다고 실용만 볼 건 아니다.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를 유치해 국격(國格)을 드높일 계기도 마련했다. 또 기후변화협약 정상회의에선 “나부터(Me first)”를 역설해 박수를 받았다.

취임 이후 주변 강대국과의 관계도 튼튼해졌다. 한미동맹은 전임 대통령 때보다 훨씬 건강하다. 2012년의 전시작전권 전환 등 과제가 있긴 하다. 한일 관계 역시 화해와 협력에 무게가 실린다. 한중 관계도 마찬가지다. 현대건설 회장으로서 북방 개척에 힘 쏟은 그는 한-러 관계도 매끄럽게 만들 수 있다. 고 김대중 대통령(DJ)은 좋은 정치인의 자질로 두 가지를 꼽았다. 서생(書生)의 문제의식과 상인의 현실감각이다. 특히 현실감각이 뛰어난 이 대통령은 외치(外治) 역량 또한 탁월하다.

외치에는 역대 대통령 중 DJ가 단연 뛰어났다. 재임 중 노벨 평화상까지 수상했다. 사회민주주의 전통이 강한 유럽에서 특히 평가가 높았다. 임기 중반 DJ는 유럽 순방을 마친 뒤 몽골을 거쳐 귀국길에 올랐다. 당시 국내는 ‘옷 로비 사건’으로 시끄러웠다. 귀국 전날 울란바토르의 호텔에서 기자회견이 열렸다. 한 기자가 “(법무)장관을 경질할 겁니까”라고 물었다. DJ의 표정이 순간 굳어졌다. 손으로 탁자를 내리치며 “그만합시다”라고 말한 뒤 회견장을 총총 떠났다.

밖에서만 잘해선 안 된다. 안에서 더 잘해야 한다. 2월 임시국회가 열렸지만 여야 간 ‘죽고살기 싸움’이 재연될 게 뻔하다. 세종시 및 4대강 문제와 사법개혁, 국회개혁, 행정개편 등 나라의 장래를 가를 현안이 즐비하다. 그러나 대화와 소통으로 타결의 실마리를 찾을 여지는 보이지 않는다. 이 대통령은 다보스포럼에서 한국 대통령으로선 처음으로 기조연설을 했다. 공중에 붕 뜬 듯한 기분이었을 거다.

그러나 밖의 융숭한 대접과 추어올림은 잠시다. 지난달 30일 귀국길에 오르면서 이 대통령은 ‘한여름 밤의 꿈’에서 화들짝 깨어났을 거다. 10년 전 DJ가 그랬던 것처럼 내정의 난맥에 골머리를 싸맸을 것 같다. ‘화려한 외치, 빈곤한 내치’는 곤란하다. 바둑 둘 줄 아는 사람은 안다. 중원을 탐하는 세력 바둑이 모양은 좋지만 근거를 챙기지 못하면 와르르 무너진다는 것을. 설날 전이든 후든 대통령이 세종시 문제를 직접 껴안아야 한다. 박근혜 전 대표를 만나고, 충청도도 방문해야 한다. 무엇보다 서생의 문제의식도 보듬어 이들을 설득하고, 오바마처럼 초당적 리더십까지 발휘하면 좋겠다.

늘어선 내치 현안 못 풀면 물거품

이 대통령은 그동안 22차례, 28개국 31만6828km(약 지구 8바퀴)를 내달렸다. 잘했다. 그러나 밖에서 상찬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대학입시가 그렇듯이 대통령도 안에서 잘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안정된 내치 없는 외치는 공허하다. 집안을 잘 다스려야 평천하(平天下)도 할 수 있다. 주역에 항룡유회(亢龍有悔)라는 말이 있다. 하늘 끝까지 올라간 용은 나중에 후회하게 된다는 말이다. 이상은 높게 두되 발은 땅에 디뎌야 한다.

1992년 미국 대선에서 ‘클린턴의 아이들’은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라는 카피로 대권을 먹었다. ‘바보야, 문제는 내치야!’라는 낮은 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최영훈 편집국 부국장 tao4@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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