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호 칼럼]국치 100년을 곱씹어야할 이유

  • Array
  • 입력 2010년 1월 21일 03시 00분


코멘트
“한국 황제폐하는 한국정부에 관한 일체의 통치권을 완전하고도 영구히 일본 황제폐하에게 양여함.” 1910년 8월 29일에 공표된 한일병합조약 제1조이다. 국권을 빼앗긴 우리 대한의 백성은 제 나라 말도 마음대로 쓰지 못하고 심지어는 성명까지 일본화하도록 강요당하는 망국노의 처지로 전락했다가 일본의 완전항복 덕분에 35년 만에 그 손아귀에서 놓여날 수 있었다.

한일 양국을 숙적으로 만들었던 이 일을 재조명하기 위한 준비로 일본의 언론인들은 작년부터 열심히 한국을 드나드는 모습을 보였지만 우리 측에선 정부고 언론이고 일반 국민이고 올해가 국치 100년임을 의식한다는 기미가 별로 보이지 않는다.

망국의 설움을 딛고 서서 세계 선진국의 대열에 당당히 진입하고 있는 오늘, 국치의 아픈 기억을 새로이 해야 하는 것은 과거의 앙금을 겨우 걷어내고 정상적 선린관계를 유지하는 일본에 대해 적개심을 북돋우거나 친일파에 대한 성토를 되풀이하는 일이 필요해서가 아니다. 국제관계에서 약육강식은 형식만 조금씩 달리할 뿐 오늘날도 마찬가지로 계속되는 현상이다. 공익보다 사익, 의리나 염치보다 실리를 챙기면서도 아름다운 명분으로 포장하며 자기최면에 빠진 무리가 기회만 있으면 날뛰는 일도 친일파에만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국치일을 기억하며 계속 던져야 할 질문은 어쩌다 우리가 저들에게 나라를 송두리째 넘볼 수 있는 기회를 주었던가 하는 것이다. 몇몇 ‘원흉’에게 책임을 전가한다고 우리 일이 끝나지는 않는다.

아픈 역사적 기억을 되새기는 주목적은 비슷한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그러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점이 우리의 운명에 대한 책임은 궁극적으로 우리 스스로가 질 수밖에 없으며 과거에서 배우되 과거에 대한 지나친 집착으로 현재와 미래를 그르치는 일을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는 자각이다.

미몽-분열이 낳았던 망국의 수치

과학기술의 실용화에 앞섰던 서양의 열강이 동양의 기둥이던 청국을 치명적으로 강타하던 상황에서 그 그늘에만 안주하고 살았던 우리는 역사의 흐름이 어느 쪽으로 가는지 방향도 못 잡고 뿌리째 흔들렸다. 위기적 상황에서 미약한 힘이나마 하나로 합치기는 고사하고 지도층 내부에서나 지도층과 서민 관계에서나 서로 책임을 전가하며 싸우느라 공동으로 직면한 위험의 실체가 어떤 것인지 파악도 못하고 대응전략이 없었으니 나라가 송두리째 넘어가는 비극을 당했다.

일본에 면죄부를 주려 하느냐는 지탄을 받을 각오를 하면서 이런 소리를 하는 이유는 격정과 아집과 욕심이 이성과 양식, 양심을 마비시켜 버리는 듯한 우리의 정치 풍토, 사회 풍토를 바라보노라면 망국 전야의 전철을 밟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기 때문이다. 망국의 원인에 대해서도 극복의 경과나 시점에 관해서도 폭넓게 합치되는 이해조차 없는 상황이니 우리가 하나의 국민으로 결속되어 있다고 할 수 있나 하는 의문이 들 지경이다.

식민지 치하에 살면서 자나 깨나 ‘우리의 소원은 독립’이었다. 드디어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만천하에 선포함으로써 소원을 성취했다. 우리 역사에서 프랑스 혁명이나 미국의 독립혁명에 해당하는 역사적 사건이 있었다면 바로 대한민국의 건국이었다. 독립을 향한 민족 전체의 염원과 이승만 김구를 비롯한 애국투사의 헌신적 지도력에 힘입어 독립은 물론 계급타파와 성차별 철폐를 위한 법적 토대까지 마련하는 혁명을 대중봉기가 아니라 선거를 통해 단번에 이룩했다. 그런데도 국치일 100년을 맞는 대한민국에서는 건국의 의미가 얼마나 대단하며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선열의 공로에 얼마나 감사해야 하는지에 대한 감각이 거의 없는 듯하다.

정치-사회 편가르기 풍토 걱정

비록 우리 헌법의 권능이 38선 이북까지 미치지는 못했고 이승만 건국 대통령은 자기가 법적 토대를 마련한 민주주의를 완성시키지 못한 죄로 불명예 퇴진을 했지만 독립을 위해 일생을 바치고 민주주의를 심기 위해 공산주의자는 물론 미국인과도 맞서곤 했던 업적까지 부정할 수는 없다. 프랑스혁명의 화신이라 할 수 있던 로베스피에르도 단두대에서 처형됐지만 혁명에 대한 기여를 송두리째 부정할 수는 없는 일과 마찬가지다. 개개인의 역량을 자유롭게 발휘할 수 있는 헌법적 토대가 없었더라면 기적적인 경제발전을 이룩하며 100년 사이에 망국의 수치를 경제선진국의 자긍심으로 대치시킬 힘이 어디에서 나올 수 있었겠는가.

자기가 몸담은 나라의 역사적 연혁과 이념적 토대에 대해 국민이 공유하는 인식이 없다면 100년 전 국치에 맞먹는 큰 위험이 또 닥치지 말라는 보장이 없다. 극단적 분열주의의 고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정치인은 특히 국치의 원인이 어디에 있었던가를 생각해 볼 일이다.

이인호 KAIST 김보정 석좌교수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