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김창혁]望外의 기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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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9년 12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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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그 우파 지식인(?)들에게 감사해야 할 것 같다. 변형윤, 리영희, 백낙청 등 좌파인물 15인의 사상과 활동에서 ‘억지와 위선’을 찾아냈다는 그들의 책을 들춰보다 백낙청 선생에 관한 궁금증 하나를 해결할 수 있었다.

몇 년 전 리영희 선생의 자서전 ‘대화’를 읽다 생긴 궁금증이었다. 선생은 5·16군사정변에 대한 당시 지식인들의 반응을 회고하면서 에피소드 하나를 소개했다. ‘돈 없고, 빽 없는’ 사람의 자식들만 군대가던 시절이라 박정희 군사정권의 병역 기피자 색출 작업은 그 어떤 비상조치보다 국민적 지지를 받았는데, 바로 그때 하버드대 박사과정의 한 청년이 군 복무를 위해 자진 귀국해 박수갈채를 받았다는 얘기였다. 선생은 대담자인 임헌영 교수에게 “그게 누군지 아시오? 그가 바로 백낙청 교수요”라고 했다.

하지만 리영희 선생의 기억은 부정확했다. 백낙청 청년의 입대는 5·16 직전이었다. 입대 후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근무하긴 했지만…. 여하튼 32세 하버드대 박사과정생의 자진 귀국과 입대는 큰 뉴스였던 모양이다. 동아일보는 ‘軍門 두드린 어학의 천재, 공부 계속하라는 권고도 물리치고’라는 제하에 “白 군은 찾아간 기자에게 ‘국민의 의무를 다하려는데 무슨 기사가 됩니까?’라고 도리어 의아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고 보도했다. 백 군은 그 전해에도 ‘한국 학생의 우수성을 과시, 미 브라운 대학서 우리 백군이 영예의 졸업식 연설’(동아일보 1959년 6월 12일자)이라는 기사로 소개될 만큼 뉴스의 인물이었다.(기사 제목에 ‘우리 백군’이라니, 정겹기 짝이 없지 않은가!)

백낙청 선생이 정말 5·16 군사정권의 사회정화 시책에 호응해 자진 입대를 결심한 것이었을까 하고 궁금해하던 차에 우파 지식인(?)들의 활동에 힘입어 이런 기록들을 되돌아볼 수 있었으니 나로선 우선 망외(望外)의 소득이었다. 또 덕분에 ‘창비’를 추억할 수 있었으니 망외의 기쁨이라고 해야 할 듯하다.

임형택 전 성균관대 한문교육학과 교수의 말처럼 청년 백낙청은 ‘한국적 근대서사의 영웅’이었지만 현실영합형 엘리트 코스를 밟지 않았다. 그는 ‘창작과 비평’을 창간해 1970, 80년대 비판적 지성의 진지(陣地)를 구축했고, ‘창비’라는 두 글자는 ‘사상계’에 이어 한국 현대지성사의 위대한 유산(The Great Legacy)을 상징하는 아이콘이 됐다. 변형윤, 리영희 선생이 남긴 유산도 마찬가지다. 감히 주장컨대, 그런 유산의 세례들이 없었다면 우리 지성사는 ‘공안(公安) 조서’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우파의 시대라고 한다. 하지만 ‘창비’나 백낙청 같은 유산들이 친북좌파 같은 말 몇 마디로 단죄당하는 사회는 시쳇말로 ‘격’이 없는 사회다. 좌우(左右)는 그 다음의 문제다. 좌든, 우든 홍위병이나 완장부대들이 준동하는 사회에서는 격을 운위하는 것 자체가 난센스다.

말이 나온 김에 ‘격’ 얘기를 조금 더 하자. 이명박 정부는 내년에 개최하는 G20 정상회의의 성공과 국격(國格) 제고 방안을 놓고 고심 중이라고 한다. 아무래도 내년엔 국격에 관한 논의가 난분분할 듯하다. 흔히 국격이라고 하면 ‘국가의 격’을 먼저 생각한다. 그러나 ‘국민의 격’이 뒤를 받쳐주지 않으면 경제규모나 대외경쟁력이란 말과 다를 게 뭐 있겠는가. 무엇이 국격인지부터 다시 얘기해야 한다.

김창혁 교육복지부장 ch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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