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육정수]유병진 판사의 고뇌

  • 동아일보
  • 입력 2009년 12월 12일 20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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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당 정권 때 유병진이라는 판사가 있었다. 1958년 ‘빨갱이’로 기소된 진보당 조봉암 당수의 간첩 혐의 부분을 무죄 판결한 판사다. 그렇다고 유 판사가 친북 좌파는 아니었다. 대한민국의 국시(國是)와 국법(國法)를 존중한 판사였다. 유 판사는 조 피고인에게 국가보안법 위반죄만을 적용해 징역 5년을 선고했지만 2심과 대법원은 잇달아 사형을 선고했고 조 씨는 처형됐다.

반세기가 지난 사건을 다시 떠올리는 이유는 조봉암을 재평가하려는데 있지 않다. 조봉암 사건에 앞서 1950년 6·25 당시 유 판사가 부역자 재판에서 보인 이성적 판단과 균형 감각이 새삼 값지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여론 狂氣에 고심한 부역자 심판

서울지방법원 판사였던 그는 6·25 남침 후 9·28서울탈환(수복)까지 석 달 동안 북한군 치하에서 부역행위를 한 사람들을 심판했다. 인간으로서, 재판관으로서 고뇌한 과정을 수기로 남긴 ‘재판관의 고민’(신동운 서울대 법대 교수 편저)에 그의 남다른 법철학적 성찰이 녹아 있다. 신 교수는 “광기에 가까운 여론의 압력 속에서도 법 정의의 핵심에 다가가려는 치열한 문제의식이 들어 있다”고 평한다.

부역자는 ‘비상사태하의 범죄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령’에 의해 사형, 무기 또는 10년 이상의 징역에 처하게 돼 있었다. 재판은 단심제였다. “부역자는 종자를 말려야 한다”는 험악한 사회 분위기에서 재판이 시작됐다고 유 판사는 적고 있다.

서울 수복 후 수사기관들은 부역자 일제검거에 나서 한 달 간 1만 여명을 연행했다. 북한군의 위협에 어쩔 수 없이 100원 정도의 소액을 내놓은 사람도 부역죄로 처단될 처지였다. 유 판사 자신도 법원을 따라 임시 수도 부산으로 혼자 떠나는 바람에 남은 가족은 부역자들의 핍박 대상이었다. 세 살 박이 아들도 잃었다. 심정적으로는 부역자들을 철저히 처단해야 마땅했다.

그러나 유 판사는 감정을 따르지 않았다. 대소경중(大小輕重)을 가리지 않고 모든 협력행위를 부역죄로 규정한 비상조치령의 해석과 적용을 놓고 거듭 고민했다. “내가 만약 서울에 남아 북한군 치하에 있었다면 어떻게 행동했을까”란 물음을 끊임없이 자신에게 던졌다.

당시 서울은 “겁내지 말고 안심하라”는 대통령 특별방송이 있은 뒤 불과 3, 4시간 만에 점령당했다. 북한군이 남침한지 이틀만이다. 정부가 남하하고 있는 사이 북은 “이승만이 사로잡혔다” “부산도 며칠 안 남았다”는 등 기만전술로 남아있던 서울 시민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이런 상황에서 총살의 위협을 무릅쓰고 그들의 요구를 거역할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생명의 위험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인간의 생존 본능을 법이 무시할 수 있는가. 유 판사는 적의 치하에 있는 한 어느 정도는 순종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북한군 치하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 죄일 수는 없다. 모든 시민들이 반공투사로 행동해준다면 그 이상 좋을 수 없지만, 그런 기대는 불가능한 일이다. 평범한 시민, 즉 평균인에 대한 기대 수준이 법의 기준이라 할 수 있다. 모든 부역행위를 범죄로 본 비상조치령은 당시 국내에서 막 태동하던 ‘기대 가능성 이론’에 어긋난다는 것이 유 판사의 판단이었다.

‘기대 가능성論’으로 輕重 구분

부역자에 대한 양형이 처음엔 판사에 따라 천차만별이었다. 단심으로 끝나 조정 기회도 없었다. 너무 가혹하다는 비판도 제기됐다. 마침내 관계 당국이 ‘과거부터 좌익분자가 아닌 한 관대한 처분도 가(可)하다’는 지침을 내렸다. 기대 가능성 이론을 재판에 접목시킨 유 판사의 고뇌가 승리한 것이다.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가 최근 건국세력을 포함한 1005명의 친일행위자 명단을 발표했다. 적정성 논란에 이어 정식 소송이 잇따를 전망이다. 판사들의 불가피한 과제로 다가오고 있다. 친일 여부 판단에 대한 법리(法理)도 부역행위 심판의 경우와 유사할 것이다. 적(敵) 치하의 강압적 분위기에서의 협력행위라는 공통점이 있다.

육정수 논설위원 sooy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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