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박제균]정책은 속도다

  • Array
  • 입력 2009년 11월 30일 03시 00분


코멘트
“저는 지금 이 순간 엄숙한 마음으로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대통령 긴급명령을 발표합니다.”

1993년 8월 12일 오후 7시 40분. 김영삼(YS) 대통령의 금융실명제 전격 발표에 누구보다 놀란 사람은 아들 현철 씨였다. 당시는 김영삼 정권 초. 현철 씨가 말 그대로 ‘소통령’이던 때였지만 그 역시 실명제 발표에는 ‘물을 먹었다’.

그가 물 먹은 사실은 YS 정권 말인 1998년 2월 드러났다. 검찰 조사 결과 현철 씨가 실명제 실시 직후인 1993년 10월 국가안전기획부 계좌를 이용해 대선 때 쓰고 남은 비자금 50억 원을 변칙으로 실명 전환하려 한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실명제는 대통령의 아들이자 정권 실세도 모를 정도로 철통 보안 속에서 전광석화처럼 추진됐다. 문민정부 비화를 다룬 책 ‘잃어버린 5년-칼국수에서 IMF까지’(동아일보 특별취재팀)에 따르면 실명제는 1993년 6월 29일 김 대통령과 이경식 경제부총리의 독대에서 결정된 뒤 극비리에 입안해 한 달 반 만에 발표했다.

금융실명제는 이전 전두환, 노태우 정부 때도 추진했으나 반대 여론에 무릎을 꿇은, 민감하기 이를 데 없는 ‘뜨거운 감자’였다. 정권 초의 자신감에 철저한 보안과 스피드가 아니었다면 시행할 수 없는 정책이었다.

금융실명제는 이후 커다란 정치적 파장을 일으켰다. 실명제의 여파로 1995년 10월 노태우 전 대통령의 5000억 원 규모 비자금이 드러난다. 이를 정치적 동력으로 삼아 1995년 12월 검찰은 12·12쿠데타 및 5·18민주화운동, 비자금 사건 등으로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을 구속했다.

한국인의 잠재의식 속에 제왕처럼 여겨졌던 전직 대통령들이 함께 죄수복을 입고 법정에 선 모습은 우리의 민주·민권의식 발전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게 내 생각이다.

뜬금없이 YS 얘기가 길어진 것은 되는 일도, 안 되는 일도 없는 현 정부의 ‘지지부진’ 때문이다. 사상 초유의 외환위기를 맞아 ‘나라 망친 대통령’이라고 불렸지만, 적어도 YS 정권은 주요 정책을 추진할 때 ‘철통 보안 속에 속도감 있게 입안하고→한목소리로 터뜨려→힘 있게 시행’할 줄 알았다. ‘깜짝쇼’ 소리를 듣기는 했지만 말이다.

지금처럼 대통령 직속 미래기획위원회 곽승준 위원장이 ‘초등학교 취학연령 단축’을 발표하고, 한나라당 정두언 의원이 외고 입시에 대해 입을 열면 주무부처인 교육과학기술부가 황당해하는 중구난방은 없었다.

세종시, 4대강 유역 개발, 종합편성채널 승인 문제 등 이 정부의 주요 정책 곳곳에서 지지부진, 중구난방이다. 현 정권이 집권 초 방송개혁에 실패한 것도 대선 때부터 ‘집권하면 방송을 손보겠다’는 식으로 떠들었기 때문이란 해석이 많다. 방송 기득권 세력의 공포감을 자극해 오히려 ‘결사항전’ 의지를 단단히 해줬다는 것이다.

다시 YS로 돌아가 보자. 그를 평가할 때 ‘군내 파워 사조직인 하나회를 척결해 대한민국을 처음으로 군부 쿠데타의 공포에서 벗어나게 했다’는 데는 이견이 별로 없다.

YS 정권 때의 주돈식 대통령정무수석비서관에 따르면 “(YS가) 대통령 후보 시절 외국기자들이 ‘당신이 대통령에 당선되면 군 세력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라고 묻자 ‘두고 보자’고 짧게 대답했다”고 한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만일 YS가 그때 “당선되면 손보겠다”고 속내를 드러냈다면 어땠을까. 그래도 하나회가 YS 집권 초까지 넋 놓고 있다가 순순히 ‘무장해제’당했을까.

박제균 영상뉴스팀장 phark@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