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송평인]옛 동독주민의 시위서 느낀 ‘자유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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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9년 11월 1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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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베를린장벽 붕괴 20주년에 가장 많이 듣는 단어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자유 속에서 사는 사람은 자유가 진정 무엇인지 잊어버리기 쉽다. 베를린에서 동독 출신의 40대 여성 코리나 베른하르트 씨를 만났을 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에게는 이 자유가 손에 잡힐 듯이 생생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최근 슈타지문서보관소(BStU)를 찾았다가 동독 시절 한낱 식당종업원에 불과했던 자신과 관련한 신상을 적은 것이 보고서 형태로 무려 80쪽에 이르는 것을 확인하고 놀랐다. 게다가 이것은 같은 아파트에 살던 여자친구에게 소개받아 사귄 남자친구가 자신을 감시한 결과물이었다. 어머니 얘기도 들려줬다. 장벽이 생기기 전 동서독 간 통행이 비교적 자유롭던 시절, 동베를린에 살던 어머니는 처녀 시절 서베를린으로 가 애인을 만나고 돌아오곤 했는데 장벽 때문에 갈 수 없게 됐다. 어머니는 결국 동독에서 지금의 베른하르트 씨 아버지가 된 남자와 결혼했지만 40년이 넘어서도 그 시절 남자친구를 잊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동독 라이프치히에 사는 헨리크 슐체 씨 부부는 20년 전 둘 다 16세 고등학생으로 장벽 붕괴의 도화선이 된 월요시위에 참여한 것을 기억한다. 그들은 “태어나서 시위란 걸 처음 보았다. 시위를 막기 위해 포포(Vopo·인민경찰)가 시내에 쫙 깔렸다. 촛불을 드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우리는 물건을 사러 가는 척하면서 슬그머니 시위대에 끼어들었다”고 전했다.

이들은 지금 그토록 갈구했던 자유를 만끽하며 살고 있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쟁취한 자유를 어떻게 지키며 살아가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지난달 동독 지역 운터덴린덴 거리에서는 원자력에 반대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100여 명의 시위대를 제복을 입은 경찰과 명찰을 단 집회 인도인이 나란히 앞장서서 인솔하고 있었다. 여기에 소방관과 의무관들이 뒤를 따르고 경찰기동대 차가 시위대에 바짝 붙어 보도에까지 오르내렸다. 이것이 장벽 붕괴 20년이 지난 후 대대적인 ‘자유의 축제’를 벌이는 동독 지역 시위 모습이다.

문득 한국 사회 모습이 눈앞을 스쳐갔다. 광우병 거짓 선동에 놀아난 폭력 시위를 ‘집회의 자유’라고 우기는 사람들은 대체로 북한 주민이 마땅히 누려야 하는 가장 기본적 자유 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는 듯하다. 외국에서도 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정도의 극단적인 집회의 자유를 주장하기보다는 가장 기본적 자유를 한반도에 사는 좀 더 많은 사람이 누리도록 노력하는 게 나을 것이다.

송평인 파리특파원 pi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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