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정성희]백신 접종의 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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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9년 10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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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한테서 연락이 왔다. 독감백신 2인분을 어렵게 확보했다며 하나는 자기 아이에게 맞힐 것인데 다른 하나를 얼른 맡으라는 것이었다. 초등학생 아들에게 맞힐 것인가, 어머니에게 맞으시라고 할 것인가. 잠시 생각한 뒤 이튿날 친구에게 전화를 하자 ‘이미 다른 사람이 맞았다’며 나의 게으름을 나무랐다. 대단한 철학적 고민도 아닌데 머뭇거리는 사이에 가족 접종 기회가 날아가 버렸다.

“차례 기다려 맞겠다”는 오바마

변명 같지만 백신을 꼭 맞아야 하는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인과(因果)관계가 분명치 않다곤 하지만 독감백신을 맞은 후 사망하는 사고가 잇따른다는 소식도 불안감을 가중시켰다. 나만 그런 것도 아닌 모양이다. 신종 플루 백신 접종이 시작된 미국에서도 백신을 맞으려는 사람들이 어린이를 포함해 새벽부터 장사진을 치고 있지만 안전성 논란도 가시지 않고 있다.

미국 의료기관 종사자들은 정부가 백신의 안전성과 효과를 충분히 검증하지 않았다며 최근 소송을 제기했다. 미국의 AP통신과 GfK 여론조사에 따르면 자녀에게 신종 플루 백신을 맞히겠다는 부모는 38%에 그쳤다. 돼지독감이 유행했던 1976년의 ‘백신 악몽’이 이런 분위기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당시 돼지독감으로 인한 사망자는 1명이었던 반면 접종자 4000만 명 가운데 500명이 ‘길랭 바레 증후군’을 앓아 그중 25명이 사망했다. 지금의 백신 제조 기술수준은 30년 전보다 훨씬 높아졌지만 효능 검증과 엄격한 품질관리로 안전성 논란을 잠재우는 것은 변함없는 정부의 역할이다.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백신을 맞을 수 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백신의 특성상 다음 계절에 어떤 바이러스가 유행할지 예측해 미리 생산에 들어가므로 최소한 두 계절(6개월) 전에 주문해야 한다. 시기를 놓치면 백신을 구입할 수도 없고, 접종해봐야 소용도 없다. 접종한 뒤 일정한 시간이 지나야 항체가 형성되기 때문이다. 만일 백신을 주문했는데 독감이 유행하지 않는다면 백신은 휴지통으로 직행한다. 예측을 잘못해 예산을 낭비했다고 국정감사에서 두들겨 맞을 리스크는 항상 있다.

그래서 어느 나라나 한정된 백신 물량을 놓고 어떻게 배분할지 고민한다. 북한이 이런 문제에 직면한다면 고심하지 않을 것이다. 선군(先軍)을 내세워 ‘공화국 군대’에 먼저 나눠주면 될 것이기 때문이다. 2002년 미국 46개주 공중보건 관계자들이 모여 타미플루 분배에 관한 원칙을 세우기 위해 난상토론을 벌였으나 결론을 내지 못했다. 사망자 감소가 목표라면 고위험군(群)인 노인에게 먼저 접종해야 하고 감염확산 방지에 우선순위를 둔다면 학생들에게 먼저 접종해야 한다. 이처럼 백신 배분 문제는 세대 간 정파 간 갈등으로 번질 개연성을 안고 있기에 정치적 판단까지 개입된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지난달 “일반국민처럼 차례를 기다려 백신을 맞겠다”고 언급한 것도 이 문제의 민감성을 잘 알기 때문일 것이다.

사망자 감소냐, 감염확산 방지냐

다음 주부터 우리나라에서도 신종 플루 백신 접종이 시작된다. 의료기관 종사자와 방역요원, 환자 접촉 가능성이 큰 일부 군인이 먼저 맞고 이어 초중고교 학생, 생후 6개월∼만 6세 아이 및 임신부 순으로 접종한다. 노인과 만성질환자에 대한 접종은 내년 1월로 미뤄진다. 날씨가 추워지면서 학교와 학원을 중심으로 신종 플루가 급속히 확산되고 있어 정부가 사망자 감소보다는 감염 확산 방지를 선택한 셈이다.

노인이나 만성질환자들은 서운할 것이다. 나이가 들었다고 건강한 삶에 대한 애착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추위 속 독감백신 접종 행렬을 봐도 알 수 있다. 백신 접종 우선권 논란은 개인의 이익과 사회의 이익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윤리적 질문을 던지며 우리 사회의 성숙도를 시험하고 있다,

정성희 논설위원 shch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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