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박원재]이정희 씨에게 ‘미소’를

  • 입력 2009년 9월 25일 02시 5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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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기 너머로 들려온 목소리는 밝았다. ‘장사가 잘 되는구나’ 싶어 마음이 편해졌다. 경기 남양주시 오남읍 양지리의 한 아파트 단지 앞에서 국수가게 ‘국시마루지짐이’를 운영하는 이정희 씨(48·여)다. 지난달 17일 식당을 연 그는 “하루에 국수 50그릇 정도를 팔 것으로 예상했는데, 20그릇밖에 못 팔 때도 있지만 목표치를 넘기는 날도 종종 있다”고 했다. 자금 사정이 빠듯해 식당홍보 전단지를 돌릴 엄두도 못 내지만 손님들의 입소문 덕택에 단골이 늘고 있다며 뿌듯해 했다.

이 씨는 동아일보와 보건복지가족부, 하나금융그룹이 공동으로 펼치는 ‘2009 함께하는 희망찾기1-탈출! 가계부채’ 캠페인을 통해 무담보 소액신용대출(마이크로 크레디트) 대상자로 선정됐다. 남편의 사업 실패로 파산신청까지 했다가 하나희망재단에서 연 3%의 저금리로 빌려준 2000만 원으로 가게 보증금을 내고 창업했다. 그는 “불경기에도 그럭저럭 꾸려갈 수 있어 다행이지만 월세와 전기료, 가스료 같은 공과금을 내느라 현금이 부족해 조마조마한 심정”이라고 털어놓았다. 그래도 마이크로 크레디트의 도움으로 다시 일어설 수 있게 된 것을 늘 감사하게 여긴다고 했다.

저소득층 가구에 낮은 금리로 자활자금을 빌려주는 ‘미소(美少·아름다운 소액대출) 금융’ 사업이 본궤도에 오르면 이 씨처럼 실의에 빠졌던 이웃들이 재기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다. 시중에 돈이 넘쳐난다지만 원할 때 원하는 금액을 은행에서 빌릴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은행 대출은 고사하고 저축은행이나 캐피털업체처럼 금리가 비싼 제2금융권에서도 외면당하면 최고 연 49%의 고금리를 감수하고 대부업체로 갈 수밖에 없다. 당국이 과잉 유동성의 폐해를 걱정한 올해 2분기에도 29개 대형 대부업체의 대출 금액은 전 분기보다 20% 늘었다.

신용도가 낮고 담보로 제공할 변변한 부동산도 없어 은행 문턱에서 번번이 좌절하는 서민들에게 연 5%대의 금리로 최대 1억 원까지 빌려준다는 것은 꿈같은 얘기다. 서민들의 삶에 이처럼 구체적이고 직접적이며 현실적으로 도움이 되는 정책을 접한 기억이 별로 없다. 시민운동 차원에 머물렀던 마이크로 크레디트를 정부가 책임지고 주도하는 국책 프로젝트로 격상시킨 정책적 상상력이 돋보인다. 차가운 논리가 지배하는 경제정책에서 모처럼 따스한 감성의 온기를 느낄 수 있다.

‘한국판 마이크로 크레디트’ 구상엔 허점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2조 원의 재원 전액을 대기업과 금융회사 기부금으로 조성한다는 대목에서 지금은 한물간 ‘관치금융’의 혐의를 떠올린 이가 있을 것이다. 돈은 민간이 대는데 생색은 정부가 낸다는 오해를 부를 소지도 있다. 하지만 ‘제도권 금융에서 소외된 서민을 보듬는다’는 소중한 취지는 이런 흠결을 덮기에 충분하다.

출발은 그럴싸했지만 실제 집행 과정에서 온갖 꼼수와 결탁, 비리가 끼어들어 정작 도움을 받아야 할 실수요자가 밀려나고 엉뚱한 사람의 배만 불린 사례가 많았다. 서민금융을 챙긴다는 상징적 효과는 충분히 거뒀다. 한 푼의 누수 없이 돈이 꼭 필요한 곳으로 흘러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이제 금융당국이 감당해야 할 몫이다.

이 씨는 미소 금융 사업이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기를 바란다고 했다. 어설픈 운영으로 사업을 망친다면, 그건 서민들의 가슴에 또 한 번 못을 박는 짓이다.

박원재 경제부장 parkw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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