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오명철]추석 선물 보낼 곳 정했나요

  • 입력 2009년 9월 16일 02시 5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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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우연한 기회에 배우 강수연 씨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던 중 그가 갑자기 “어려워져보니 주변이 정리되더라”고 말해 내심 놀랐다. 특히 “도움이 돼줄 줄 알았던 사람이 외면하고, 관심이 없는 줄 알았던 사람이 적극 도와줄 때는 남이 아닌 나 자신을 탓하게 된다”고 했다. 최근 출연작이 없긴 했지만 여전히 ‘월드 스타’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예쁘고 도도한 그녀 또한 엄연한 생활인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또래 여배우들의 당당한 리더로 영화계와 영화인들이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마다 발 벗고 나서는 그녀가 그런 이야기를 하게 된 데는 뭔지 모르지만 사연이 있어 보였다.

퇴임하면 인연끊는 세상인심

자리를 함께한 유명 로펌의 변호사 한 분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다. 기업회생 전문 변호사로 법정관리나 화의 신청을 낸 기업인들과 심층 대화를 나누다 보면 한결같이 세상인심의 변화에 깊은 배신감을 토로한다고 한다. 기업이 잘나갈 때는 간이라도 빼줄 것 같이 굴던 사람들이 자금 압박을 받는다거나 부도설이 돌면 태도가 확 변해버린다는 것이다. 특히 엊그제까지 “돈이 필요하면 얼마든지 갖다 써라”라고 하던 금융기관에서 문전박대를 당할 때와 평소 우호적으로 대해주던 공무원이 혹 자신에게 불똥이 튈까 봐 안면을 바꿀 때는 “정말 세상을 헛살았구나” 하는 자탄이 절로 나온다고 한다.

유명 스포츠용품 전문업체 사장을 지낸 사람이 겪은 실화 한 토막. 그가 사장으로 재직할 때 명절만 되면 거래업체 등으로부터 처치 곤란할 정도로 선물이 답지했다. 하지만 그가 회사를 그만둔 후 처음으로 맞는 추석에 딱 2개의 선물이 집에 도착했다. 예전에는 감사전화도 한 통 안 하던 그였으나 이번에는 선물을 보낸 사람들에게 직접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중 한 사람은 그가 사장을 그만둔 지 전혀 모르는 상태였고, 오직 한 사람만 마음을 담아 선물을 보낸 것을 알게 됐다.

공직에서 은퇴한 분들을 만나도 그런 소리를 듣는다. 현직 때 혀에 감기듯 잘하던 부하들이 퇴임 후에는 딱 발길을 끊는 사례가 많다는 것이다. 특히 자신이 아끼던 사람이 그런 식으로 나올 때는 배신감을 넘어 분노를 느낀다고 한다. 하지만 현직에 있을 때 별로 잘해 준 기억이 없는 이들이 가끔씩 전화를 걸어 식사대접도 하고 명절에 선물도 보내 올 때면 고마운 마음과 함께 “내가 사람 보는 눈이 그것밖에 안 됐었구나” 하고 뉘우치게 된다고 한다. 영국의 한 기업윤리연구소는 선물과 뇌물의 차이점을 3가지로 구분한다. 첫째 ‘물건을 받고 잠을 잘 못 이루면 뇌물, 잘 자면 선물’이다. 둘째 ‘언론에 발표되면 문제가 되는 것은 뇌물, 문제가 안 되는 것은 선물’이다. 셋째 ’자리를 바꾸면 못 받는 것은 뇌물, 바꾸어도 받는 것은 선물’이다. 또 선물은 ‘선뜻 주는 것’, 뇌물은 ‘뇌를 굴리면서 주는 것’이란 우스갯소리도 있다.

걱정끼친 분들께 감사인사를

일찌감치 세상인심 변화를 겪어 본 인사들은 “사람들은 나를 좋아한 것이 아니라 내 자리와 영향력 또는 돈을 사랑한 것”이라고 진단한다. 또 “전임자를 잊어버리는 사람이 정상이고, 기억해 주는 사람이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라”고 당부한다. 골프를 좋아하지만 자리에서 물러나면 자기 능력으로는 칠 수 없을 것 같아 아예 얼마 전부터 아내와 함께 탁구장을 들락거리고 있는 대기업 임원도 있다.

추석이 다가오면서 여기저기 선물이 오가는 모습을 보게 된다. 경기가 좋아졌다지만 보통사람들의 삶은 여전히 팍팍하다. 그래도 주변을 한번 둘러보자. 회사를 떠난 상사는 어떻게 지내고 계신지. 오랫동안 찾아뵙지 못한 은사님은 건강이 어떠신지. 실직 혹은 이혼의 시련을 겪고 있는 친구나 후배는 명절을 어떻게 보낼 계획인지. 특별히 더 어려워진 이웃은 없는지. 그러다 보면 자연스레 선물을 보내야 할 곳이 떠오를 것이다.

오명철 전문기자 osca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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