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덕 칼럼]추미애의 ‘X칠 정치’

  • 입력 2009년 7월 5일 20시 04분


“나는 무늬만 여자”라는 기업인을 만난 적이 있다. 자신을 아녀자 취급하는 세상에 맞서 ‘남자와 사랑할 때만 여자’라는 생각으로 사업을 키웠다고 했다.

추미애 민주당 의원 역시 여성 정치인으로 취급되기를 거부할 듯하다. 국회 환경노동위원장으로 비정규직법 상정을 막아낸 그는 군복무에 비유해 이유를 설명했다. “2년 동안 제대할 날짜만 쳐다보고 복무했는데 제대 하루 전날 2년 더 복무해야 한다는 명령을 내린다면 복종하고 싶겠나.” 남자세계인 군대까지 안다는 의식의 발로 같다.

어쩔 수 없는 여자 한계 들켰다

2002년 대선 직전 “다음 대통령은 정몽준? 속도위반하지 말라. 우리에게는 정동영도 있고 추미애도 있다”는 노무현 후보의 발언으로 추미애는 일순 대통령감 대열에 올랐다. 여자는 온화하고 협조적이며 소통과 관계 지향적이라는 고정관념을 그는 사정없이 박살낸다. 강하고 목표 지향적이라는 점에서 오히려 고정관념상의 남자에 가깝다. 구원의 여성상 ‘추다르크’의 이미지는 17대 총선 당시 열린우리당이 떨어져 나간 뒤의 민주당을 3보 1배로도 구하지 못해 퇴색됐지만 이번 비정규직 사태로 일약 정치권을 평정한 인물이 됐다.

그는 “역사의 한고비를 국민과 함께 넘겼다”고 자부하고 있다. 사회적 합의와 서민 보호라는 원칙을 지켰다는 의미다. 그러나 리더십을 발휘해 비정규직법 처리를 제대로 이끌었다면 정치인으로서 입지를 더 굳혔을 것이라는 말이 민주당에서도 나온다. 추 위원장은 한나라당에 대해 “대한민국 국회를 전 세계에 웃음거리로 만드는, 50년 헌정사를 ×칠하는 행위”라고 한발 더 나아감으로써 스스로 이미지에 ×칠을 하고 말았다.

자기주장이 강한 그는 자신이 ‘오버’했다고 생각지 않을 것이다. 의외로 여성 정치인이 더 강경하고 더 공격적인 커뮤니케이션을 구사한다고 미국 미주리대 미첼 매키니 교수는 분석한 바 있다. 약한 여자라는 이미지를 깨기 위해 자기만의 원칙에 집착하기도 한다.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이 대선기간에 “독재자와 협상하지 않겠다”며 버락 오바마보다 강하게 나온 것도 그래서였을지 모른다.

하지만 싫어도 인정해야 할 부분이 있다. 남자와 여자는 다를 뿐 아니라 다르게 평가받는다는 사실이다. 여자는 부드러워야 한다는 고정관념과, 지도자는 모름지기 강하고 목표 지향적이어야 한다는 리더십의 자질은 양립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여자가 남자처럼 비치면 밥맛없는 여자로 찍혀 리더가 되기도 전에 고꾸라지기 십상이다.

가혹한 이중기준이 부당한 것 또한 사실이나 세계 어디에도 존재하는 편견을 부정하는 건 시간 낭비다. 21세기가 여성의 세기라고? 착각하지 마시라. ‘남자다운 클린턴’을 이긴 건 여자 뺨치는 온화함과 소통, 관계 지향성을 겸비한 ‘변혁적 리더십’의 오바마였다.

‘내 원칙’이 국익보다 중한가

‘여성과 조직리더십’을 쓴 강혜련 이화여대 교수는 “입지를 굳히기 전까진 여성다움으로 환심을 산 뒤 리더가 된 다음에 진가를 발휘하라”고 했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도 같은 전략을 썼다. ‘철의 여인’ 마거릿 대처 영국 전 총리는 남자들의 거부감을 사지 않으려고 배우 로렌스 올리비에 경한테서 화술까지 배웠다. 남자가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숱한 장애물을 통과해야 선덕여왕이 탄생한다.

최고 지도자가 되겠다는 야망을 감추지 않는 추미애는 다음 대선 때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의 대항마가 될 심산이었을 거다. 이번 ‘×칠 정치’로 그는 남성정치인보다 더 많은 비난을 사게 됐다. 그에 비하면 박근혜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강한 리더십에 육영수 여사의 모성적 이미지를 갖춰 ‘여자니까 안 된다’는 반감을 덜 사는 보기 드문 유형이다. 요즘 친박(親朴)계 수장으로 내려앉은 감이 없지 않지만, 상황에 따라 전투복을 바꿔 입어 대중의 정서에 다가설 줄 안다. 매사에 원칙만 외치는 통에 ‘일을 되게 하는 정치인’이라는 대통령감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하는데 그게 여자라는 한계 때문이라면 절망적이다.

정치와 파워의 묘미는 안 되는 일도 되게 하는 데 있다. 유능한 여자가 밥맛없다고 해서 밥맛없는 여자가 유능한 건 아니라는 점을 여성 정치인은 알아야 한다. 우리 회사에서 청소하는 아줌마들도 “추미애 때문에 비정규직이 잘린다며?” 걱정하는 세상이다. 그는 민심을 잘 듣고(Listen) 민심에서 배우고(Learn) 그 다음으로 리드(Lead)하는 3L을 지도자의 덕목으로 꼽았으나 안타깝게도 3L 결핍을 자신의 입으로 드러내는 자살골을 던졌다.

노파심에 밝힌다면, 이 글은 사주(社主)의 지시로 쓰지 않았다. 8년 전 추미애는 자신이 ‘가당치도 않은 놈’이라고 했던 이문열에 대해서보다 자기에 대한 기사를 작게 썼다는 이유로 우리 기자에게 “사주의 지시로 글을 썼느냐. 사주 같은 놈”이라고 퍼부었기에 미리 하는 소리다.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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