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덕 칼럼]영어라는 이름의 ‘글로벌 사다리’

  • 입력 2008년 1월 31일 20시 02분


“국제 기능어인 영어를 못하면 일종의 문맹같이 된다. 영어 몰입교육은 교사 재교육 등 준비단계를 거쳐 가능한 지역부터 빨리 추진해야 한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서 나온 말이 아니다. 현 정부 교육부총리를 지낸 김진표 대통합민주신당 정책위의장이 지난달 28일 라디오에서 이런 말을 하는 순간, 나는 기절할 뻔했다.

본질은 세계화 對反세계화

김진표가 누군가. 자기 딸은 외고 보내 명문대 경영학과에 진학시켰으면서도 청와대 코드에 맞춰 외고 확대를 막았던 인물이다. 외고의 어학계열 대학진학 비율이 낮으면 외고 지정을 취소한다고 위협까지 했다.

물론 외고와 영어교육은 다른 문제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본질은 다르지 않다. 나는 공부를 못했어도 내 자식은 잘하기를 바라고, 나는 영어에 한이 맺혔지만 내 자식은 안 그러길 부모들은 바란다. 이런 부모 심정을 현 정부는 가진 자와 소외된 자의 대립으로, ‘영어를 유창하게 하는 친미파’의 지독한 이기주의로 몰았다. 과하면 과하달 수도 있는 부모들의 욕심이 있어 한강의 기적도 가능했다는 사실을 좌파 정권은 모질게 외면해왔다.

차기 정부의 영어 공교육 강화 논란 역시 본질은 같다. 김 의장이 뒤늦게 고백한 대로 ‘영어는 다른 나라 말이라기보다 국제사회에서 살아남는 데 꼭 필요한 기능어’다. 영어를 생활화할 수 있도록 학교에서 제대로 가르치는 건 ‘컴퓨터를 가르치는 것과 똑같다’. 그런데도 영어교육이 뇌관으로 떠오른 건 교사의 자기보호 본능과 학부모의 공교육 불신, 그리고 변화에 대한 두려움 때문만이 아니다. 영어와 교육이라는 두 가마솥 속에 신구 세력의 가치와 이념이 끓고 있기 때문이다.

수구 좌파가 세계화와 시장경제의 나쁜 점만 강조해 왔다는 걸 모를 사람은 없다. 세계화의 열매가 지식정보 분야로 몰리면서 세계의 교육도 글로벌 경쟁력 키우기로 가는 추세다. 이걸 그들은 양극화 키우기라며 공격했다. 외고와 서울대로 상징되는 수월성 교육 죽이기가 대표적이다.

교사들도 금밥통 전교조가 능력별 반편성과 교원 평가까지 결사반대해준 덕에 입때껏 편할 수 있었다. 그런데 세상은 바뀌었고 국민은 새 정권을 선택했다. 학생이 공부를 하든 말든, 사회에 나가 제 밥벌이를 할 수 있든 없든, 어른이 돼서도 영어 때문에 고통을 받든 말든 태평하기 그지없었던 학교도 이젠 뼈를 깎아야 할 때가 됐다.

논란이 불거질 때마다 단골로 등장하는 “총론찬성 각론반대” 주장은 효과적 발목잡기로 변질될 우려가 크다. 공부엔 왕도가 없는 판에 영어교육에 대왕의 교수법이 있을 리 없다. 영어교사가 영어를 영어로 가르치는 것조차 완벽하게 준비를 마친 뒤 해야 한다는 주장은 모든 부모가 자식을 키울 준비가 완벽해질 때까지 임신을 미루라는 것과 마찬가지다.

중국은 2001년 2월 초등학교 3학년 영어 도입 등 대대적 교육개혁을 발표하고는 가을학기부터 즉각 시행하고 있다. 상하이에선 초등학교 1학년부터 매일 한 시간 영어수업을 하고, 일부 중학교는 컴퓨터 수학 과학 지리 예능수업 때 영어를 절반 이상 쓴다.

영어교사 열 명 중 여섯이 TESOL 같은 교육을 받고도 충분치 않다고 힘들어 하지만 그래도 중국은 한다. 안 하는 것보다 낫기 때문이다. 교사가 힘든 만큼 학생의 실력은 나아질 수 있다. 새 정부 영어 공교육 강화 방안에서 단 하나 고쳐야 할 점이 있다면 2013년 수능시험 영어능력평가 도입이 아니라 영어교사 영어능력평가 도입이다.

남도 못 올라타게 걷어차진 마라

사람과 기업이 국경 없이 경쟁해야 하는 세계화시대, 영어는 세계무대로 연결해주는 글로벌 사다리다. 세계화와 상관없이 살고 싶은 사람이야 어쩔 수 없지만(그래서 학교 선택권은 확대돼야 한다) 올라타기 싫다고 걷어차진 말아야 한다. 아무리 공교육이 뛰어나대도 여유 있는 계층의 사교육은 사라지지 않는다. 영어 공교육 강화를 늦출수록 손해 보는 쪽은 좌파가 그렇게도 끔찍이 위한다고 외쳤던 소외된 계층일 뿐이다.

김순덕 편집국 부국장 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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