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마당]병원 진료정보 국세청 제출

  • 입력 2007년 1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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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정산을 위해 의료기관이 가진 진료 정보를 국세청에 제출하는 개정 소득세법에 대해 의료계와 세무 당국 간에 뜨거운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지난달 시행에 들어간 개정안에 대해 헌법소원을 제출한 의료 단체들은 “국세청 홈페이지에 올라가는 정보의 보안이 잘 지켜질지 의심스럽다”며 정보 유출과 악용 가능성 등을 지적하고 있다. 국세청은 “온라인 자료에 의료기관 이름과 진료비 정도만 나오지 병명 등 자세한 진료 기록이 없어 프라이버시가 침해될 위험은 없으며 유출 위험이 거의 없다”고 반박한다. 양측의 토론을 소개한다.》

▼정보 보안 잘 지켜질지 의문▼

‘동물농장’으로 유명한 영국 조지 오웰의 작품 중에 ‘1984년’이라는 소설이 있다. 정부가 허구적 인물인 ‘빅 브러더’를 내세워 독재권력의 극대화를 꾀하면서 사람의 생각과 행동을 속박하며 심지어는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인 성욕까지 통제하는 내용이다. 그들은 텔레스크린이나 마이크로폰 같은 첨단 기술과 사설경찰 같은 정보망을 이용한다.

재정경제부는 연말 정산 간소화라는 명분으로 2005년 12월 31일에 소득세법 165조를 일부 개정했다. 모든 의료기관은 환자의 소득공제를 위하여 모든 환자의 진료기록을 국세청장이 지정하는 기관에 제공토록 하는 내용이다. 법 개정으로 모든 환자의 진료기록이 국세청에 제출되며 세무당국은 이를 온라인에서 확인할 수 있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정보를 보호받아야 할 기본적인 권리가 있다. 특히 건강과 관련된 정보는 누구에게나 알려주고 싶지 않은 부분이다. 자세한 진료기록이 아니라 병원을 이용했다는 사실조차 다른 사람에게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이 사람의 심리다.

의료법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환자의 진료 내용과 진료 사실을 다른 이에게 알려주지 않는 것이 의료인의 기본적인 의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장에서 일하다 보면 타인의 의료 정보를 알려 달라고 찾아오는 사람을 적지 않게 만난다. 원칙적으로 알려 주지 않으며 불가피한 경우 본인의 동의 여부를 확인한다. 바뀐 법대로라면 이제는 본인 동의를 받지 않더라도 정보를 내줘야 한다.

정부는 안전을 담보한다고 하지만 온라인상에 올라간 자료의 보호는 매우 취약하다는 사실이 이미 알려졌다. 보안이 철저하다는 금융기관 자료도 심심치 않게 유출 사고를 겪는다. 건강 정보가 유출될 위험은 금융 정보 못지않게 높다.

의료 정보는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악용될 위험이 높다. 기업체가 불법 취득한 개인의 건강 정보를 직원 채용에 이용해 탈락시킨 사례가 있다. 보험회사에서는 가입자의 건강 정보를 이용해 가입을 제한했다. 병의원을 이용하는 사람은 건강을 위해 돈을 쓸 수밖에 없으므로 건강 관련 사업자에겐 의료 정보가 매우 유용하다.

2004년의 경우 국민건강보험공단이 공공기관에 제공한 개인의 신상 및 질병 정보는 12만8328건에 이른다. 2006년에는 건보공단으로부터 1만5000여 명의 개인 정보가 유출돼 빚을 받는 등 여러 목적에 사용됐다는 국정감사 보고가 있었다.

개인정보보호법조차 제대로 입안되지 않아 시행하지 못하는 형편에서 무분별한 정보 수집은 개인의 인권 침해를 불러올 가능성이 매우 높다. 소득세법 개정이 의료인의 세금 탈루를 잡아내거나 개인의 정보 이용을 편리하게 하기 위해서라면 얻는 것에 비해 잃는 것이 너무 많다.

인권은 아주 소중하다. 다른 무엇을 얻기 위해 희생해도 괜찮은 것이 아니다. 연말정산 간소화라는 미명 아래 저질러진 소득세법 개정은 우리 미래를 조지 오웰이 내다본 우울한 세상과 같이 만들 것이다.

심상덕 대한산부인과의사회 학술이사


▼프라이버시 침해 위험 없다▼

바람직한 조세제도가 갖춰야 할 특성의 하나로 학자들이 단순성을 꼽는 이유는 납세자 부담을 최소화하기 위해서이다. 미국 납세자들은 매년 소득세신고를 위해 18억∼21억 시간을 사용한다는 연구가 있다. 영국은 세금 납부와 처리에 드는 납세자와 행정기관의 비용을 세수의 약 4.9%로 추정한다.

선진국은 이런 실증적 연구를 토대로 세제나 세정을 납세자 위주로 단순화하는 작업을 국가적 과업으로 추진하고 있다. 미국의 TRA86이나 영국의 TLRP, 호주의 TLIP가 대표적 사례이다. 미국 민주당이 해밀턴 프로젝트에서 제시한 내용의 핵심은 신고서식 간소화에 있다.

정부는 2005년 말 소득세법을 개정해 의료비, 보험료 등 8개 항목에 대해 납세자가 증빙서류 없이 국세청 전산망을 이용해 간편하게 연말정산을 할 수 있는 제도를 도입했다. 연말에 바쁜 와중에도 소득공제용 증빙서류를 발급받으려고 병원, 학교, 금융기관을 뛰어다녀야 하는 불편과 시간 낭비 등 사회적 비용을 고려했다.

새 제도에 따라 전체 의료기관의 약 80%가 국세청에 자료를 제출했다. 일부 보완이 필요한 부분이 있지만 도입 초기임에도 불구하고 납세자의 호응 속에 성공적으로 정착하는 중이다. 일부 의료단체는 환자의 비밀 보호, 정보 유출을 통한 악용 가능성을 우려하며 자료 제출을 반대하지만 설득력이 없다.

첫째, 소득세법에 의한 의료비 증빙자료 제출은 의료법상 문제가 없다. 의료법에서 이미 다른 법령에 의한 자료 제출을 허용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문제라면 국민건강보험법에 따라 요양급여를 청구하기 위해 훨씬 광범위하고 상세한 정보를 건강보험공단에 제공하는 일은 더 큰 문제가 된다.

둘째, 납세자는 자기 정보가 건보공단과 국세청에 통보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경우 거부할 수 있다. 이런 내용은 재정경제부, 국세청, 건보공단 홈페이지에 공시돼 있다.

셋째, 국세청의 의료비 지출 정보는 공인인증서를 통해 본인만 조회할 수 있다. 부부간이라도 배우자의 정보를 조회할 수 없다.

넷째, 의료기관이 제출하는 내용은 의료기관명, 환자명, 수납일자 및 금액 등 연말정산에 꼭 필요한 정보로 한정된다. 연말정산을 위해 국세청이 납세자에게 제공하는 정보의 범위는 이보다 더 좁아서 의료기관 명칭의 경우 앞의 한두 글자만 표시한다.

다섯째, 개인정보 유출은 관련 법령의 벌칙규정에 따른 처벌 문제로 접근해야 한다. 건보공단에서 지난해 9건 정도가 유출됐는데 극히 일부에 불과한 유출 사례가 자료제출의 거부 사유가 될 수는 없다.

결론적으로 새 제도는 국민의 납세비용을 줄이기 위해 도입했고, 법적으로 아무 하자가 없으며, 개인정보 유출도 엄격히 차단한다. 의료기관이 자료 제출을 꺼리는 이유는 소득 노출에 대한 우려 때문으로 추정된다. 우리 사회의 투명성 제고 과정에서 나타나는 불가피한 현상이다. 다만 소득 노출에 따라 일시적으로 의료기관의 세금 부담이 크게 늘어나는 사례가 없도록 경감장치를 통해 보완하는 일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김재진 한국조세연구원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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