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 시론/정옥자]文治-人本의 한 해를 기대하며

  • 입력 2005년 12월 3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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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해가 저물고 새해가 시작되었다. 흐르는 물과 같이, 쏘아버린 화살같이 빠르게 달아나는 세월, 저무는 해는 항상 다사다난한 해로 규정되고 거기엔 빛과 그림자가 교차된다. 지난해에 유난히 충격적인 일이 많았다고 느껴지는 것은 세밑을 강타한 황우석 서울대 석좌교수 사건 때문일 것이다. 황 교수 사건이 빛에서 그림자로 이동한 반면 지난해의 빛은 당연히 한류일 터이다.

한류의 중심부에 있는 영화나 드라마는 과학기술 없이는 불가능한 분야이다. 애초에 서양 배우기에 나서면서 고민하였던 지향인 동도서기(東道西器·서양의 기술에 우리의 도를 담는다)론에 입각해 볼 때 서양기술이라는 그릇에 우리의 역사와 문화, 인정과 자연, 한국적 정서와 풍토 등을 담는 작업이 성공하고 있다는 말이다. 우리가 서양을 배우기 시작한 지 1세기가 경과한 지금에 와서야 모방의 단계에서 창조의 단계로 진입한 것으로 이해된다.

앞으로 세계 최첨단을 자부하는 반도체기술이나 영상기술은 훌륭한 서기(西器)의 역할을 감당할 전망이다. 거기에 담을 우리의 도(道)가 지금까지는 대중문화에 머물렀지만, 앞으로는 인간을 중심에 둔 고차원의 철학과 평화 메시지 등 전통에 기반을 둔 고급문화를 담아내야 하지 않겠는가. 제국주의시대에는 빛을 보지 못한 붓 문화의 문치주의(文治主義) 전통이 지식기반사회에서 빛을 발하기 시작하리라 전망된다.

최근 패션계를 읽는 코드로 단연 ‘투박함’이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는 보도도 하나의 시사점을 던져 주고 있다. 뿔테 안경에 복고풍 코트를 입고 텁텁한 목소리에 신파조 가사, 우는 듯한 창법의 노래를 즐기는 젊은이가 늘어나고 도회적 세련미에 날카로운 이미지를 추구하던 사회가 뭉툭하고 투박한 것을 추구하는 경향으로 바뀌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에 대하여 전문가들은 여러 가지 해석을 하고 있는데 각박한 디지털시대에 살면서 아날로그적 인간미를 찾으려는 욕구 내지는 인간중심적 지향을 보이고 있다는 데 일치하고 있다. 근대화 이후 우리 사회가 잃어버리고 있는 인간중심주의를 되찾고자 하는 욕구의 발로가 아닐까? 근대화 이전 우리 전통시대는 그야말로 인간중심주의 세상이었다.

전통시대 바람직한 인간형은 바로 투박함과 둥근 모습으로 형상화할 수 있다. 남자는 뚝배기같이 투박한 맛이 있어야 남자답고 믿음직하다는 평가를 받았고 딸 가진 이에게 듣기 좋은 덕담은 ‘부잣집 맏며느릿감’이라는 말이었다. 자그마한 키에 보름달같이 둥근 얼굴, 약간 통통한 몸매에 후덕한 인상의 처자에게 주어지던 칭찬이었다.

나이 들어 좋은 일 중의 하나가 둥그스름해지는 것에 익숙해진다는 것이다. 새파랗게 날이 서서 이러저러한 비판의 칼날을 휘둘렀던 지난 세월이 부끄러워지고 뾰족했던 얼굴이 둥글게 변하는 나의 모습이 편안하게 느껴지니 말이다. 학문의 길은 옳고 그른 것, 즉 시비를 따지는 것이라 굳게 믿고 이른바 의(義)에 비중을 두었던 것이 어느새 인(仁)으로 무게중심을 옮겨가고 있는 자신을 문득 발견하곤 한다.

유교의 인은 기독교의 사랑이고 불교의 자비(慈悲)이다. 인이 너그러움을, 포용력을 상정한다면 사랑은 좋아한다는 느낌이 강하고 상대적이다. 그에 비하여 자비는 중생을 불쌍하게 여기는 슬픔이 느껴진다. 이 유한한 세상에서 끝내는 빈손으로 돌아가 한줌의 흙이 될 우리 모두 참으로 불쌍한 존재가 아닌가. 우리 자신들이야말로 우리를 슬프게 하는 존재인 것이다. 병술년 새해를 맞아 지나간 아픈 상처는 서로 보듬고 서로를 긍휼히 여기며 상생의 희망을 가져 본들 어떠리.

정옥자 서울대 교수·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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