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에서 살아보니]민원정/한국産 문화는 없나요

  • 입력 2005년 8월 19일 03시 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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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일어나 TV를 켠다. 주인집 아주머니가 오래되었어도 멀쩡하다고 자랑하며 건네준 골드스타 텔레비전이다. ‘Tecnolog´ia Coreana(한국의 테크놀로지)’란 말이 들려 무슨 소리인가 하고 보니, 새로 나온 대우 나노 세탁기 광고다.

중국제와는 비교가 안 된다고 종업원이 추천해서 두 번 생각도 안 하고 산 삼성 전자레인지에 우유를 데워 마시고 집을 나선다. 집 근처 백화점 쇼윈도에 진열된 삼성 디지털카메라와 LG 냉장고가 서로 인사하는 것 같다. 역에 걸린 삼성 TV가 전하는 간략한 뉴스를 들으며 지하철을 기다린다.

오늘은 2학기 첫 수업. 학생들에게 한국문화 수업을 수강하게 된 동기를 물었다. “동양과 관련된 모든 것이 궁금하다”는 조금은 거시적인 이유부터 “한국이란 나라가 궁금해서 수강 신청을 했다”는 기분 좋은 대답도 있지만 “원래는 일본이나 중국과 관련된 수업을 듣고 싶었는데, 그런 수업이 없어 할 수 없이 이 수업을 신청했다”는 듣기엔 거북하지만 솔직한 대답도 있다.

수업 중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이미지를 묻는다. 한 학생이 세계지도를 그린 후 중국 안에 점 하나를 찍어 놓고, 여기가 한국일 거라는 말을 겁도 없이 한다.

다 같이 지도를 보며 한국이 어디에 있는지부터 시작한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정확한 위치를 찾지 못한다. 5년 넘게 일본어를 공부해 오고 있다는 한 학생이 우습다는 듯 말한다. “저기 일본 위, 중국 아래 있는 나라 아닌가요?”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옆 사람이 LG 휴대전화로 전화를 하고 있다. 거리에는 현대자동차의 새 모델들이 쌩쌩 달린다. 스쿨버스의 상당수는 기아 봉고차다.

한국 상품이 넘쳐서 그럴까. 한국 사람은 다 무언가를 팔러만 다니는 줄 아는지, 처음 칠레에 왔을 때 세관원은 내게 “뭐 팔러 왔니?”라고 물을 정도였다.

칠레 정체성 연구로 유명한 수베르카소 교수는 한국에 대한 이미지를 묻는 내게 이렇게 답했다.

“내게 있어 이전의 한국은 전쟁을 겪은 가난한 나라, 한인 거주지역에서 값싸고 품질은 그저 그런 옷을 파는 사람들의 나라였다. 밀려오는 한국 상품, 밝고 개방적인 한국 유학생들을 보고 난 한국에 대한 생각을 달리했다. 그런데 얼마 전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이라는 영화 속 한국은 섬세한 감성과 뛰어난 문화를 소유한, 영화인들의 나라였다. 지금 한국에 대해 아주 혼란스러운 이미지를 갖고 있다. 어떤 것이 진짜 한국인지를 잘 모르겠다.”

한국과 칠레가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한 지 1년이 넘은 지금, 양국의 총교역량은 크게 늘고 있다. 앞으로 더 많은 한국 상품이 태평양을 건너 칠레로 몰려갈 것이다. 그러나 파도타기에 취해 정작 우리를 제대로 알리는 일을 잊으면 어쩌나 염려가 된다. 수출을 늘리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장기적인 안목으로 우리 문화를 알리는 일에도 신경을 써야 할 때가 온 것 같은데, 칠레에는 아직 한국산 상품만 있는 것 같다.

민원정 칠레 가톨릭대 아시아프로그램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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