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김순덕/퓰리처상

  • 입력 2004년 4월 6일 18시 5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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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수꾼이 좋은 소리 듣기는 쉽지 않다. 내기 장기에서 훈수 잘못하다간 멱살 잡히기 십상이다. 미국의 ‘신문왕’ 조지프 퓰리처(1847∼1911)는 체스판에서 훈수를 잘 둔 덕에 기자가 됐다. 헝가리 출신 용병으로, 넝마주이로, 이일 저일 전전하다 영어공부 좀 하겠다고 세인트루이스 시 도서관을 찾았을 때였다. 체스룸에서 어깨 너머로 체스게임을 보다가 타고난 ‘기자 정신’을 주체하지 못해 몇 마디 한 것이다. 너무도 예리한 논평에 체스 두던 사람마저 감탄했다. 유력 독일어일간지 베스틀리헤 포스트의 편집자였던 그들은 퓰리처에게 신문기자직을 제의했다.

▷퓰리처의 언론관을 한마디로 하면 파수견(watchdog)이라 할 수 있다. ‘다리 위에서 국가라는 배를 감시하는 직업’이 언론인이라 했고, 옳고 그른 것을 가르치는 도덕교사가 신문이라 믿었다. 그가 신주처럼 모신 저널리즘의 사명은 권력과 금력이 개입된 부정부패를 폭로하는 파수견 역할이었다. 사실, 정론을 지향하면서도 선정적인 ‘황색 저널리즘’을 추구했던 언론의 이율배반성을 퓰리처만큼 극명하게 보여준 이도 없다. 그러나 신문의 사회적 책임에 무엇보다 충실했다는 점에서 이 같은 허물은 덮어지고도 남음이 있다.

▷그의 유산으로 창설된 퓰리처상 올해 수상자가 발표됐다. 사건 아닌 평범한 인간의 시각에서 미국 점령 이후를 보도한 워싱턴포스트의 앤서니 샤디드 특파원(국제보도상), 베트남전 당시 미군의 양민학살 의혹을 파헤친 뒤 “정부가 30년간 뭔가를 숨기려 해도 우리는 그걸 알아내기 위해 여기 있는 것”이라 했던 오하이오주 톨레도 블레이드의 마이클 살라(탐사보도상) 등의 수상은 한국의 언론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7일이 48회를 맞는 신문의 날이다. 참여정부 출범 이후 정부와의 관계에 따라 신문도 편을 가르는 분위기가 팽배하다. 하루 앞서 열린 기념식에선 “신문의 중요한 기준은 권력과의 호불호가 아니라 독자와의 관계”라는 지적이 나왔다. 퓰리처의 말마따나 어떤 정부가 들어서더라도 파수견 역할을 포기한다면 신문이랄 수 없다. 눈에 보이는 사건 아닌, 권력과 금력이 감추려드는 진실을 보도하는 신문의 사명을 다시 생각할 때가 지금이다.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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