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국제마라톤]장석주/모두가 勝者, 패자는 없었다

  • 입력 2004년 3월 14일 19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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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주 시인·문학평론가

바람은 없는데 공기는 차갑다. 마스터스 참가자들이 이미 도로를 가득 점령하고 있다. 참가자들은 커피를 마시고 웃고 스트레칭을 한다. 고적대 연주가 신명을 돋우고, 구급배낭을 멘 보조요원들은 인라인스케이트를 타고 그 사이를 헤집고 다닌다. 출발 시간이 다가온다. 흥분과 긴장으로 내 심장 박동이 빨라진다.

직립보행 능력을 얻은 이래 인류는 달리는 기술을 익혔을 것이다. 수렵과 채취 시대에도 달리기 능력은 생존의 질을 높였다. 근대 문명은 몸의 이동속도의 임계점을 기계에 의지해 돌파했다. 기계는 강하고 빠르지만 몸은 연약하고 둔중하다. 근대 이후 몸을 써서 달리는 것에 보람과 결실이 줄어들고 그 가치가 폄훼되자 몸 쓰는 일에 태만해졌다. 달리기의 가치가 새롭게 발견된 건 거의 기적이다. 그 재발견의 정점에서 마라톤 열기가 점화된다. 달리는 사람은 시간과 공간을 몸으로써 전유한다. 그 전유는 곧 몸에 대한 긍지와 인생에 대한 자신감으로 지펴진다.

오전 8시 정각, 출발 신호로 쏘아 올린 대포 소리에 놀란다. 공중에 포연이 자욱하다. 앞으로 내닫는 참가자들의 함성에 광장이 들썩한다. 엘리트부문 선수들이 야생 짐승처럼 앞으로 튀어나간다. 외국 초청선수들 사이로 우리의 기대주 이봉주와 지영준 선수도 보인다. 사람들이 도로를 메우고 나아간다. 저 꿈틀거리는 군집(群集)의 흐름이 왜 감동적일까? 마라톤은 몸과 영혼 사이의 대화다. 고행에의 자발적 참여이며 자기와의 숭고한 고투다. 그래서 마라톤은 곧 인생이라는 우아한 은유를 얻는다.

15km 지점까지 레이스가 급박한 흐름을 탄다. 15명 안팎의 선수들이 한 무리가 되어 달린다. 세계 최고기록도 예감케 하는 아주 빠른 페이스다. 성급한 기대는 금물. 선수들의 발걸음이 눈에 띄게 느려진다. 35km 지점에서 거트 타이스와 윌리엄 킵상이 흑표범처럼 대오에서 벗어나 치고 나간다. 이봉주와 지영준 선수가 속절없이 뒤로 처진다. 거트 타이스는 정말 잘 달린다. 폭주 기관차 같다. 2시간 7분 6초. 국내 마라톤 경기에서는 최고의 기록이다. 이봉주와 지영준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들어온다.

남자 선수들의 레이스가 진한 아쉬움을 남긴 채 끝났다. 그 아쉬움을 여자부 이은정 선수의 우승 소식이 씻어낸다. 대회 2연속 우승을 자신하고 레이스의 중반부까지 선두로 나섰던 중국 선수 장수징을 제치고 이은정은 그대로 결승선까지 내달았다. 한국 최고기록에 불과 6초 뒤진 좋은 기록이다.

위빠사나 수행자들은 지표면 위에서 숨결을 갖고 이동하는 것들 가운데 가장 느린 속도로 움직인다. 그게 수행의 법도다. 마라토너에겐 달리는 게 숙명이자 수행이다. 공기를 가르고 뛰는 선수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살갗에 촛농이 떨어지듯 아픈 감동이 느껴진다. 위빠사나 수행자나 마라톤 선수들은 앞으로 나아간다는 점과, 전진하는 몸의 시간들을 잘게 나누며 순간에 대한 향유의 밀도를 극대화한다는 점에서 서로 닮아 있다.

서울국제마라톤은 신명나는 축제다. 이 축제에는 승자도 패자도 따로 없다. 완주한 모든 사람이 다 승자다. 모두에게 박수를 보낸다!

장석주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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