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대신 징용 자청 73세 홍해표옹 일제만행 체험수기 내

  • 입력 2001년 8월 15일 18시 18분


충북 괴산군 감물면 오성리에 사는 홍해표(洪海杓·73)옹은 광복절인 15일 오전 밭일을 하러 나가다 감물면사무소에 들렀다. 57년전 아버지 대신 일제 징용을 자청, 첫날밤을 지냈던 그 현장에 불현듯 서고 싶었던 것.

그는 최근 자신의 징용 체험을 담은 수기 ‘한맺힌 만리도강(萬里渡江)’이라는 212쪽짜리 책을 펴내기도 했다.

홍옹에게 1944년 7월 9일은 잊을 수 없는 날이다. 16세 소년 시절. 그날 점심상을 막 물리려는 순간 일본 순사 4명이 들이닥쳤다.

“홍상순(洪相淳·당시 35세·홍옹의 아버지)씨, 황국신민으로서 대일본제국 산업 전사로 뽑힌 것을 축하드립니다.”

소년 해표군은 순간적으로 할아버지가 중풍으로 드러누운 가운데 아버지마저 징용을 당하면 집안이 풍비박산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소년은 “대신 나를 데려가 달라”며 애걸했지만 어리다는 이유로 거절당하자 인솔 책임자인 ‘하시모토’를 찾아갔다. 그리고는 평소 쓰지않던 일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며 “시키는 일은 뭐든지 할테니 대신 데려가 달라”고 졸랐다.

하시모토는 일본어가 유창한데 놀라 “심부름은 잘 할 수 있을 것 같다”며 허락했다. 아버지 상순씨는 이 얘기를 전해듣고 “죽어도 내가 죽는다”며 아들을 말렸으나 이미 번복은 불가능했다.

그는 감물면사무소에서 하루를 묵은 뒤 기차를 타고 어디론가 끝없이 끌려갔다.

한해 전 초등학교 6학년 수학여행 때 처음 타 본 기차. 신기할 만도 했지만 차창 밖을 내다보는 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당시 징용은 곧 죽음이었다. 어렸지만 그도 그런 정도는 잘 알고 있었다.

부산, 시모노세키, 도쿄를 거쳐 도착한 곳은 홋카이도 우룡광업소. 이곳에서는 감물면에서 온 23명을 포함해 모두 2000∼3000명의 한국인이 탄광 강제 노역에 동원됐다.

홍옹은 빈혈과 영양실조로 탄광과 병원을 오락가락했다. 그는 몸이 약하다고 구박을 받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지만 어른들은 그야말로 지옥이었다. 한국인 징용자들의 하루 노동 시간은 12시간. 행여 몸이 아파 하루 쉬겠다고 말했다가는 사무실로 끌려가 개처럼 두들려 맞았다.

홍옹은 탄차에 무참히 치이거나 피곤한 몸을 일으키지도 못한 채 화재로 죽어간 20대의 김현수(金賢洙), 박창섭(朴昌燮) 두 형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두 사람은 동향인데다 홍옹이 어리다고 무척이나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일본군은 채탄 목표량을 채우기에 급급해 안전은 뒷전이었어. 배식 장소에 가면 불구가 된 한국인들이 부지기수였지. 막장이 무너져 수십명씩 죽었다는 얘기도 자주 들었고….”

홍옹은 1945년 광복 후 그해 12월 귀국했다. 동네에서는 효자가 났다고 헹가래를 쳤다. 충주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초등학교 교사로 지내던 83년에는 효자로 추천돼 국민훈장 석류장과 성균관장 표창도 받았다. 교사 시절에는 자신의 체험을 실감나게 강의해 어린이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그는 어떤 경우에도 일본말을 쓰지 않고 일본인은 ‘왜놈’이라고만 부른다.

“이제는 경제적 문화적으로 이겨야 해. 하지만 그 참상은 절대 잊지 말아야지.”

<괴산〓지명훈기자>mhj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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