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박물관 프레시움 개관]100여년 사회 변천사 한눈에

  • 입력 2000년 12월 13일 20시 06분


신문 기사가 한 시대를 ‘직접적’으로 비추는 거울이라면 신문의 제호나 광고, 삽화나 디자인, 연재소설은 그 시대의 문화를 ‘간접적’으로 알려준다.

15일 개관하는 ‘신문박물관’(프레시움·서울 종로구 세종로 동아미디어센터 3, 4층)의 ‘신문과 문화’ 코너는 신문의 바로 이런 기능을 통해 우리 사회의 변천과 시대상을 보여줘 박물관 관람에 재미를 더해준다.

▼ 신문 제호 ▼

1890년대에는 ‘독립신문’ ‘제국신문’ 등이 국권을 상징하는 의미에서 제호에 태극기를 넣었다. 가장 먼저 제호에 태극기를 사용한 것은 ‘독립신문’(1896년). 총독부가 민간신문을 허용한 1920년대에는 봉황이나 한반도, 무궁화를 배경으로 많이 사용했다. 1920년 4월1일 창간된 동아일보도 제호에 한반도와 무궁화를 넣었다.

총독부 기관지였던 매일신문이 1935년 제호의 배경으로 한반도와 일본열도가 붙은 그림을 사용해 ‘내선일체(內鮮一體)’를 표현한 것도 눈길을 끈다.

해방 이후에는 대부분의 신문이 한반도를 제호에 애용했으나 1990년대 후반부터는 배경없이 제호만 사용해 깔끔한 이미지를 부각했다. 신문박물관에는 이같은 각종 신문의 제호들이 실물로 전시되고 있다.

 PRESSEUM 신문박물관
- 한국의 언론 어제오늘 한자리에
- 117년 신문사 집대성 '자료 寶庫'
- 최첨단 영상통해 콘텐츠 '감동체험'

- "어! 기생들도 신문광고 냈었네"
- 아이와 함께 나누는 산 역사 체험
- 21세기 '광화문의 문화명소' 막올라

▼ 신문 광고 ▼

신문박물관에 가면 광고의 변천과정도 엿볼 수 있다. 각종 신문광고를 시대별로 전시하고 있기 때문. 우리 신문 역사상 최초의 광고는 1886년 한성주보에 실린 무역회사 ‘세창양행’ 광고다. 1900년 이전에는 약이 ‘새로운 문물의 상징’이었던 탓인지 유난히 약광고가 많았다. 1900년대초에는 옷감을 물들이는 염색약 광고가 가장 많아 당시 최고 히트상품이었음을 짐작케 해준다. 1920년대 중반의 광고 중에는 물산장려운동의 영향으로 ‘박가분’(화장품의 일종) 등 태극기를 그려넣거나 ‘우리 것’을 강조한 것이 많았다.

한가지 재미있는 것은 기생들도 신문에 광고를 했다는 사실. 명월관 장춘관 봉춘관 세심관 등 인기 요정들은 1920년 기생 18명의 사진까지 넣은 공동 신년하례 광고를 내기도 했다.

1930년대 후반부터 1940년대에는 전쟁 때문에 산업이 위축된 탓인지 광고가 줄어들고 크기도 1단짜리가 많아졌다. 또 ‘카라메루(카라멜)도 싸우고 있다’는 카피에서 알 수 있듯 전투적인 용어가 많이 등장했다.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에는 ‘자유부인’ ‘날개부인’ 등 영화 광고가 많아 영화제작이 활발하게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1970년대에는 TV 등 가전제품 광고가, 1980년대에는 여가활동이 늘어나면서 스포츠 소재 광고가, 1990년대에는 컴퓨터와 이동통신 광고가 대거 늘어났다.

▼ 신문 소설 ▼

신문의 연재소설은 그 자체가 근대 문학사와 궤를 함께 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소설과 함께 신문을 구독했다가 소설이 끝나면 구독을 멈출 정도로 연재소설은 인기였다. 홍명희(임꺽정전) 심훈(상록수) 정비석(자유부인) 박완서(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등 유명 작가의 대표작은 모두 연재소설이었다.

또 이상범 노수현 등 당대 화가들이 연재소설의 삽화를 그려 독자들이 유명 화가의 그림을 친근하게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강수진기자>sjk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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