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김재홍/전태일과 조영래

  • 입력 2000년 11월 7일 19시 11분


1970년 11월13일 서울 청계천 피복노동자들의 노동인권 개선을 요구하며 분신한 전태일(全泰壹)열사 30주기를 앞두고 그에 대한 추모운동이 확산되고 있다. 그날 그가 절규하던 현장에는 ‘영원한 노동자의 벗 …’이라는 내용의 동판이 설치됐다. ‘전태일 열사 30주기 추모사업회’는 이어 평화시장 일대를 ‘전태일 거리’로 명명하고 기념조형물 형태의 표석을 세워달라고 서울시에 촉구할 계획이다.

▷전태일이 남긴 육필 메모 중에 ‘존경하는 대통령 각하’라는 것이 있다.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내려다 불발에 그친 탄원서다. ‘90%이상이 평균 18세의 여성입니다. 어떻게 여자에게 하루 15시간의 작업을 강요한단 말입니까. …40%를 차지하는 보조공(시다)은 평균 15세의 어린이들로서….’ 박 대통령의 장기독재와 인권탄압보다도 경제성장을 공적으로 더 앞세우는 사람들이 있지만 ‘한강의 기적’은 이렇게 여공과 미성년자들까지 흘린 피땀 위에 이뤄졌다는 증언이다.

▷전태일이 사거한 후 그의 족적을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인 사람이 인권변호사 조영래(趙英來)였다. 조영래는 1965년 서울대 전체수석 입학자였으나 독재와 사회비리를 외면할 수 없어 공부에 전념하지 못하고 학생운동에 뛰어 든다. 그는 1971년 10월 대학가 위수령 때 사법시험에 합격한 예비법관 신분으로 구속돼 옥고를 치렀고 1974년 민청학련의 배후인물로 지명수배를 받자 6년간이나 숨어 살았다. 그 어려운 도피생활 중에 그가 써낸 책이 ‘전태일 평전’이다.

▷이 책에서 조영래는 ‘전태일은 자유 정의 평화와 통일의 새 역사를 창조해 가는 모든 이들의 가슴 속에 살아 있다’고 썼다. 조영래는 10·26으로 박 대통령이 사망하자 80년 ‘서울의 봄’때 수배가 해제돼 비로소 사랑하는 여인과 결혼식을 올릴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민주화의 꽃이 활짝 피는 것을 보지 못한 채 1990년 12월 43세의 아까운 나이로 타계했다. 서울 상암동에 박정희 기념관을 세우는 문제를 놓고 여러 말이 있다. 전태일과 조영래 기념관을 세우자는 얘기가 나오면 사람들은 뭐라고 할까.

<김재홍논설위원> nieman96@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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