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대통령에 바란다]배인준/실험할 여유 없다

  • 입력 1997년 12월 25일 20시 29분


일희일비(一喜一悲)해서는 안된다. 국민을 그렇게 널 뛰게 해서도 안된다. 구제 금융이 좀 일찍 들어온다 해서 빚 얻어 빚 갚는 악순환이 끝나는 것이 아니다. 국가 위기를 딛고 거듭나기 위해선 정말 먼길을 가야 한다. 우리 4천5백만은 언제 어디서 터질지 모를 지뢰밭에서 퇴로를 더듬고 있다. 그 한가운데 김대중(金大中) 대통령당선자가 섰다. 귀와 눈이 김당선자의 일언일행(一言一行)에 쏠릴 수밖에 없다. 세계도 김당선자를 주시하고 또 시험중이다. 빌 클린턴 미국대통령도, 미셸 캉드쉬 국제통화기금(IMF)총재도, 국제 투기자본의 대부인 조지 소로스도. IMF와 서방 국가들이 일정을 당겨 연말연시에 1백억달러를 내놓기로 한 것은 김당선자의 노력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 경제 각 분야 심리적 공황 ▼ 그러나 김당선자는 후보 때 입에 담은 재협상론 몇마디 때문에 「IMF와의 합의 이행」을 열번도 더 되뇌야 했다. 그러고도 모자라 미국 재무차관을 두번이나 만나줘야 했고 엄한 면접고사를 치러야 했다. 그리고 우리 시장은 미국의 안뜰이 돼버렸다. 이는 우리 경제의 큰 함정이 될 수도 있다. 근로자 정리해고 반대는 1천만표 당선후 1주일도 안돼 역사 속으로 묻어야 했다. 이것도 김당선자의 현실론에서 보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번복인지 모르겠다. 국민들도 그 말바꾸기를 따질 겨를이 지금은 없을지 모른다. 문제는 김당선자가 첫 단추를 제대로 끼우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아직은 어떤 판단도 어렵다. 다른 후보가 당선됐더라면 달러가 좀더 일찍 들어오고 시장이 조금은 더 안정되고 영국 국영방송이 태극기에 조선(弔線)을 그려넣지 않았을지 모른다. 정말 첫 단추를 잘 끼워야 한다. 가장 중요한 첫 작업은 경제의 새 틀 짜기요, 최적(最適)의 틀을 구축하기 위한 설계도를 치밀하게 그리는 일이다. 외환위기만이 위기의 전부가 아니다. 금융파산 기업파산 가계파산 우려가 4천5백만 국민을 덮치고 있다. 예금자는 은행을 못믿고 은행은 기업을 못믿고 기업은 돈줄의 배반 앞에 무너지고 있다. 정부의 관제탑 기능이 고장난지도 오래다. 말하고 싶지 않지만 각 경제부문이 심리적 패닉(공황)에 빠져 있다. 패닉 속에선 경제 흐름의 선순환(善循環)을 기대할 수 없다. ▼ 첫단추 제대로 끼워야 ▼ 김당선자는 이런 상황에서 한국호(號)의 핸들을 잡았다. 대외신인도 회복이 발등의 불이라면 나라안 각 경제부문의 상호신뢰 회복은 발바닥의 불이다. 돈을 어떻게 돌게 하고, 기업할 마음과 자신감을 어떻게 불러일으키고, 예금자와 근로자의 불안을 어떻게 씻어내 투자와 생산을 건실화할 것인가. 김당선자는 이를 위한 경제틀 재설계와 종합처방을 서둘러 해야 한다. 낡은 틀 해체과정에서 일어날 사회적 충격을 최소화할 장치도 마련해야 한다. 「시장원리대로」라는 말 한마디로 다 되는 일이라면 김영삼(金泳三)대통령도, 강경식(姜慶植)전부총리도 우리 경제를 이 지경으로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모든 은행과 기업과 근로자를 정글에 던져놓고 살 능력이 있으면 살고 그렇지 못하면 잡아먹혀도 도리없다고 한다면 그건 정치가 아니고 리더십이 아니다. 물론 혼자서 새 설계도를 다 그리고 그에 맞춰 새 집을 다 지을 수는 없다. 낡은 정치논리와 정쟁(政爭)체질에서 해방된 사람들, 진짜 능력있고 헌신적인 사람들을 사심없이 모아 새 경제의 첫 단추를 제대로 끼워야 한다. 이젠 실험할 여유가 없다. 또 스스로 세계 속으로 뛰어들고 통상도, 금융도, 건설도 세계 현장에서 일으켜 세울 사람들을 직접 키우고 독려해야 한다. 골방에 들어앉아 목이 터지라고 세계화를 외쳐대면서 처절하게 세계화에 실패한 현 대통령과 그 참모들의 전철을 밟을 수는 없다. 배인준(경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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