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순 母 도장 찍었다가 “이를 어째”…가로주택에 가슴치는 주민들

  • 동아닷컴
  • 입력 2023년 1월 7일 15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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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로주택 용역업체의 횡포는 큰 재앙 될 것”
“원자잿값 오르는데…리스크와 부채는 원주민 몫”
미등록 불법 용역 업체 판쳐도 속수무책

서울의 한 가로주택정비사업 구역에 반대 주민들의 현수막이 걸려있다.
서울의 한 가로주택정비사업 구역에 반대 주민들의 현수막이 걸려있다.


서울 강북구 미아동에 2층짜리 단독주택을 갖고 있는 86세 노모는 요즘 밤잠을 설친다. 새 집을 준다는 말에 가로주택정비사업 동의서에 도장을 찍었다가 40년간 살아온 집을 지키기 위해 소송을 벌이는 처지에 놓였기 때문이다.

할머니에게 개발정비업체 OS요원(홍보요원)이 찾아온 건 2021년 중순경이다. 낯선 사람들이 새아파트 2채를 보장해 줄테니 가로주택정비사업에 동의해 달라고 요구했다. 전단지에는 근사한 아파트 가상조감도와 함께 높은 개발이익을 보장해주겠다는 말이 적혀있었다. 다만 이를 뒷받침할 만한 객관적 근거 자료나 개별 분담금, 토지보상비 등에 대한 설명과 고지는 없었다고 한다.

노모는 좋은 사업이라 믿고 동의서에 도장을 찍었다. 이후 지난해(2022년) 중순 조합창립총회가 열렸다. 이때 사업계획을 담은 책자가 배포됐는데, 아들인 A 씨가 보고 사업의 위험성이 크다는 것을 깨달았다. 법학을 전공한 A 씨는 2000년대 초중반 부동산 지식 카페를 운영할 만큼 이 분야에 이해도가 넓은 사람이었다.

A 씨는 “100% 분양완료를 가정하고 미분양 리스크는 전혀 반영하지 않았으며 원자잿값 상승과 비용상승에 대한 내용도 전부 누락된 수치였다. 모든 사업 리스크를 원주민이 떠안게 되고, 결과적으로 살던 땅 뺏기거나 빚더미에 앉게 되는 구조”라고 주장했다. 책자에는 높은 비례율을 적어 놨지만, 정밀사업분석을 제시할 경우 비례율이 크게 떨어져 주민이 동의하기 어려운 사업이 될 것이라는 설명이다.

이에 동의를 철회하고자하는 십여 명의 소유주들이 ‘민법 제110조, 사기 강박에 의한 의사표시 취소’ 내용증명을 조합설립추진위원회와 구청에 각각 발송하고 인가를 보류해 줄 것을 요청하는 민원을 제기했다. 해당 법에 따르면, 사기나 강박에 의한 의사표시는 취소할 수 있다.

하지만 돌아온 답변은 “조합설립동의 철회는 모두 창립총회일 이후에 이뤄진 것으로, 철회 기간이 지나 효력이 없다”는 내용이었다.

도정법 33조에는 동의서를 제출한 경우에도 인·허가 등을 신청하기 전까지 철회할 수 있으나, 최초로 동의한 날로부터 30일까지만 철회할 수 있고, 30일이 지나지 않았더라도 창립총회 후에는 철회할 수 없다고 돼 있다.

즉 창립총회 전까지는 이익인지 불익인지 판단할 정보가 부족하고, 총회가 열리고 난 후에는 문제를 인지해도 철회할 수 없다는 것이 이들이 직면한 문제다.

가로주택 정비사업 동의서
가로주택 정비사업 동의서


이들에게 징구한 동의서에도 철회에 관한 내용이 있긴 하지만 나이 든 사람들은 읽을 수 없을 정도로 작은 글씨다. 게다가 사본은 주지도 않는다. A 씨는 “주민들이 추후라도 차분히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도록 동의서 사본 1장은 줘야 하는데 사본 자체를 아예 주지 않아 자녀들에게 읽어달라고 할 기회조차 원천 봉쇄해버렸다”고 항의했다.

그는 “보험, 펀드, 자동차, 심지어 핸드폰을 하나 살 때도 계약을 하고 나면 신청서 부본을 1부 고객에 준다. 또 일반 상품도 ‘표시 및 과대 허위광고’에 대해 규제하고 있는데 전 재산이 걸린 동의에 고객부담에 관한 제대로 된 설명이 전혀 없었다. 어르신들은 몰라서 적법한 철회권도 행사하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이 구역은 상실감과 분노를 느낀 주민들이 자살소동까지 벌여 경찰까지 출동하는 사태까지 있었다고 한다. 현재 비상대책위를 이끌고 있는 A 씨는 구청을 상대로 조합설립 인가 취소 소송 및 인가처분 효력정지 가처분 신청을 해놓은 상태다.

A 씨는 “동네마다 팔순 노인들 꼬셔서 동의서 받느라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다. 개별분담금이 얼마인지 토지 보상가가 얼마인지 알려 주지도 않고. 완전 아수라판이다. 눈뜨고 코 베어 가는 일들이 전국적으로 벌어진다”고 개탄했다.

강북구청에 입장을 묻자 관계자는 “현재 그런 내용(동의서 징구 문제)으로 소송이 들어와 있고, 진행중인 상태라 별도의 답변이 어렵다. 추후 변론 기일을 통해 답변 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 외에도 비슷한 이유로 주민이 반발하는 사례는 전국적으로 쏟아지고 있다. 이들은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법(도정법)이 규정한 추정분담금 등 정보제공이 전혀 없이 동의서만 무조건 받아내 서둘러 창립총회를 개최했다”며 “주민들을 기망해 받아낸 동의서”라고 항의하고 있다. 도정법 33조 10호는 “동의를 받기 전에 추정분담금 등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정보를 토지등 소유자에게 제공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대전 대덕구 비래동 일대에서 제보해온 B 씨 역시 “토지 소유주들에게 보상가나 분담금 부분을 이야기 하지 않았다”며 “이곳은 단독이 14가구 공동주택이 166가구로 사업성이 없는데, 창립총회 책자에도 종전자산평가액을 게재하지 않았다. 비례율이 낮아지면 사업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추진위는 종전자산평가액에 대해 고지할 의무가 있다”고 지적했다.

상황이 이래도 냉가슴만 않는 주민들이 많다. B 씨는 “구청에서 반대 50% 넘으면 철회해주겠다고 해서 80대 노인들이 한달 째 밤마다 혈압약, 관절약 먹으면서 승강기도 없는 빌라를 다니며 반대 동의 받고 있었는데, 조합쪽에선 ‘사업 방해로 고소하겠다’고 협박한다. 노인들이 뭔 죄가 있나. 이미 도장 찍었으니 반대했다간 다 쫓겨나게 생겼다. 자식들이 가만히 있겠냐”며 울분을 토했다.

경기 안양시 만안구 안양동에서 제보해온 C 씨도 “동의 안하면 불이익 있을 것 같은 불안감을 조성해 동의서를 징구하고 있다. 반대 소유주가 한달 만에 26%나 나왔는데 인정을 안해준다. 반대 주민에게도 연번 동의서를 발급해 20%가 넘으면 사업이 취소돼야 형평성에 맞는 것 아닌가. 가로주택정비사업은 반대자의 선택은 보장해 주지 않는 주거자유의 지나친 침해”라고 지적했다.

서울 성북구 하월곡동의 제보자 D 씨는 “동의서 미달이면 조합설립이 무산돼야 옳지만, 그들은 자기 입맛대로 구역을 재설정하고, 기간도 정해 놓지않고 반대자들이 지칠 때까지 계속 추진한다. 이곳 용역 업체는 무면허인 게 확인됐다”고 말했다.

부산의 제보자 E 씨는 “사업진행에 필수 불가결한 요소가 아니면 탈퇴권도 보장해야 하는데 누군가의 이익을 위해 남의 재산을 강제로 빼앗는 것을 법이 조장하고 있다”며 “땅 주인에게는 알려주지도 않은 채 자기가 원하는 도면을 사람들에게 내밀면서 찬반 투표를 하고, 동의 안할 땐 강제로 빼앗으면 이것이 참여권 보장인가? 모든 공공성을 띤 사업은 신중을 기하도록 각 단계에서 구제 절차가 존재하는데 가로주택사업은 문명사회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횡포를 가능하게 한다”고 비판했다.

“가로주택 용역업체의 횡포는 큰 재앙 될 것”
가로주택정비사업에 능통한 전문가는 “가로주택정비업체의 횡포는 큰 재앙이 될 것”이라며 이 사업이 성공하기 위해선 주민들의 이해도가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 공인중개사이자 현재 가로주택정비사업을 포함해 주택개발컨설팅업체를 운영하고 있는 이 전문가는 외부인이 아닌 원주민이 주도적으로 가로주택정비사업을 하는 방법을 유튜브와 블로그 등을 통해 전수하고 있다.

그는 모 가로주택사업지 사례를 소개하며 “조합설립때까지 10억에 가까운 용역비가 청구됐다고 한다. 원래 다 그런 줄 알고 조합원들이 합의를 했다 한다”며 “용역비 10억이라니 할 말이 없다. 이거 조합원들이 직접 서류 받아서 동의서 징구하면 700만 원으로도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말했다.

이어 “왜 이렇게 많은 업체들이 20~30년 동안 개발이 안되던 땅에 와서 개발이 된다고 얘기 할까? 이게 과연 꽃길만 걷는 사업일까? 업체는 무슨 이익을 위해 움직일까?”라고 반문한다.

또 “동의서 징구하는 업체는 이 사업을 과연 해봤을까? 가로주택에 대해 전반적으로 잘 이해를 하고 계신 분일까?”라며 “가로주택정비사업 검색해보면 구체적 장단점이 별로 없다. 왜냐? 안 해보신 분들이 글을 써서 그렇다. 진행, 투자, 실패를 해본 분들이 아무도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반면 “(뛰어드는 업체에게는) 다 이유가 있다. 초기사업 용역비가 목표인 업체가 많다. 신청만 하면 15억 한도로 HUG(주택도시보증공사)의 대출 나오는 게 목표인 것”이라며 “(가로주택사업은)법에서 여러가지 절차가 많이 삭제되고 권한을 준건데, 왜 특혜를 줬겠냐? 사업성이 잘 안 나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외부 업체는 사업비가 목표다. 사업비 이거 나중에 조합원들이 갚으셔야 한다. 토지 소유자들의 무관심과 안일한 대처로 큰 재앙이 올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용역비를 주더라도 사업성이 진짜 있고 좋은 결과를 줄 수 있어야 하는데, 이걸 알려면 분담금에 대해 물어보고, 분담금의 근거가 되는 사업비 평당 기준금액과 권리가액이 나오게 된 일반분양 가격이 현실적으로 맞는지 안 맞는지 객관적으로 비교를 할 수 있어야 한다”며 “일반분양분이 주변 시세와 차이가 많이 나야 한다. 예상하는 일반분양가보다 최소한 84형 기준 4~5억 이상의 주변 시세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러면서 “다른 재개발 단지처럼 공짜로 집이 한 채 생긴다? 절대 그렇지 않다. 그런 단지는 매우 드물다”며 “사업성 검토 객관적으로 반드시 하시라”고 충고했다.

특히 “사업 이익금을 관리용역에게 귀속되게 하는 계약서에 부모님께서 도장을 찍었다면 막아야 한다. 사업의 규모나 매출 규모도 특정돼 있지 않은 업체가 법의 사각지대에서 암약하고 있다”며 “업체든 구청이든 시청이든, 누구든 조합의 대표성을 가질 수 없는 특정인과 결탁되어서 진행하면 결코 성공하지 못한다. 혹시나 조합이 아닌 업체의 편에서서 일을 하시는 분이 있다면 정리하시고 합법적으로 일을 추진하시라”고 당부했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지난해 10월 “도시재생에 성공했던 곳은 거의 예외 없이 바텀업(상향식) 방식이었다”고 밝힌 바 있다.

“원자잿값 오르는데…리스크와 부채는 원주민 몫”
규모가 작고 일반분양이 많지 않은 가로주택정비사업은 다른 재개발 단지처럼 규모의 경제가 이뤄지지 않기 때문에 변수에 직격탄을 맞는다. 특히 요즘처럼 원자잿값 상승 등으로 공사비가 천정부지로 오르고, 치솟는 금리에 이주비 대출 비용 부담까지 더해지면 조합원들은 속이 타들어간다.

서울을 비롯해 전국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는 가로주택정비사업은 최근 시공사 선정 과정에서 입찰에 참여하겠다는 건설사가 없어 유찰을 거듭하고 있다. 조선비즈에 따르면, 성남 양지동의 한 가로주택정비구역은 시공사 선정 공개입찰이 3번이나 유찰된 끝에 결국 수의계약으로 결정했다.

가로주택정비사업은 수익성이 크지 않은 만큼 최대한 공사비를 덜 써야 하지만, 시공사 입장에서는 자재와 인건비가 오른 것을 반영한 공사비로 계약을 맺으려 하면서 눈높이가 맞지 않는 상황이 된 것이다.

한 조합원은 “건설사끼리 경쟁해서 좋은 값에 더 잘 짓고 싶었는데 결국 수의계약됐다”면서 “원자잿값 인상 등에 따라 공사비가 더 오를 가능성도 있다고 들었다. 분담금이 커질까봐 걱정”이라고 했다.

결국 이런 리스크로 손해를 보는 것은 모두 원주민 몫이 될 것이라는 우려다. A 씨는 “업체 입장에선 모든 리스크는 사업의 주체인 조합에 전가하면 되니까 무조건 ‘go’다. 이익만 챙기고 떠나면 그만이지만 지역 주민들은 그로 인해 모든 부채와 리스크를 평생, 아니 자손까지 상속해서 떠안아야 하는 구조”라고 주장했다.

이어 “주민은 원하지 않는 조합원의 지위에 서게 되고 조합에 귀속되는 모든 채무를 분담할 수 밖에 없게 된다. 조합 업무에 반대할 경우 매도청구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는 지위에 놓이게 된다. 수십년 살아온 자기 땅 뺏기고 쫓겨나는 팔순 노인이 바로 여러분의 부모라고 생각해 보라”고 하소연했다.

미등록 불법 용역 업체 판쳐도 속수무책
가로주택정비사업은 전국 각지에서 미등록 불법 업체가 판을 쳐도 무방비인 실정이다. 기본적으로 가로주택정비사업 조합설립 동의서 징구에 관한 업무를 대행하려면 기준을 갖춰 시·도지사에게 등록한 업체여야 한다.

소규모주택정비법 제 21조(정비사업전문관리업자의 선정 등)은 도시및주거환경정비법(도정법) 제102조를 준용하도록 돼있는데, 정비사업 동의나 조합설립인가 신청에 관한 업무를 대행하려면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자본·기술인력 등의 기준을 갖춰 시·도지사에게 등록해야 한다고 명시돼 있다.

부채액을 뺀 자본금이 10억 원(법인은 5억 원) 이상이어야 하고, 건축사 또는 도시계획 및 건축분야 기술사, 감정평가사, 공인회계사 등 전문가 상근인력(다른 직무를 겸하지 않는 인력) 5명 이상을 확보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벌칙이 없다. 도정법 제 137조(벌칙)에서는 “등록을 하지 않고 정비사업을 위탁받은 자 또는 거짓, 그 밖의 부정한 방법으로 등록을 한 정비사업전문관리업자는 2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고 규정하고 있으나 소규모정비법은 다른 건 준용하면서 이 벌칙을 준용하지 않았다.

즉 도정법을 준용해 “미등록 업체는 불법”이라고 해놓고 정작 중요한 ‘벌칙’은 가져오지 않은 반쪽짜리 법이 된 것이다. 이런 허술함 때문에 실제로 미등록 업체가 정비대행업을 하다가 재판에 넘겨졌으나 ‘처벌규정’이 없다는 이유로 처벌을 면한 사례도 과거 대구에서 있었다.

게다가 겉으로는 주민이 이끄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배후에서 미등록 업체가 좌지우지하고 있다는 제보도 많다. 제보자는 “동네 어르신을 허수아비 조합 임원으로 세워 놓고 그 뒤에 정비업체가 상주하고 있다. 조합 사무실에 가보면 정비업자가 와서 앉아 있다. 전국적으로 이러한 불법과 탈법이 판을 치는데도 입법미비 상태이다 보니 아무 죄의식 없이 이런 일이 횡행한다”고 주장했다.

다른 지역 제보자는 “조합원 170명 중에 임원이 30명이 넘는다. 그럼 4분의 1표는 찬성편으로 해서 간다는 이야기인데, 이들이 누군지 전혀 알 수 없다. 진짜 지역주민이 맞는지 의심이 들 만큼 사업지를 대표할 만한 커리어가 한 개도 없다”고 주장했다. 또 “조합장은 월급 300만 원 따박따박 받아가는데 후보가 1명이고, 감사후보들은 연혁이 ‘주부’이거나 미 게재 사항이 너무 많다. 관련 분야 지식이 없으면 어떻게 감사를 하겠나?”라고 지적했다.

박태근 동아닷컴 기자 pt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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