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황의 그늘 “화장품 빈병 삽니다”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6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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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급 케이스 1개에 7000원… “5개 모으면 일본산 에센스와 교환”
젊은층, 중고 사이트서 거래 활발… 일부 중저가품 담아 쓰며 대리만족
양주병-IT제품 박스는 짝퉁 악용도

회사원 박지은 씨(28·여·경기 부천시)는 인터넷 중고 거래 사이트에서 빈 화장품 용기를 사고파는 재미에 빠졌다. 브랜드와 제조사별로 모아 매장에서 새 제품이나 회원 적립금으로 바꾸고 있다. 박 씨는 최근 하나에 7000원 하는 화장품 용기 5개를 20만 원 상당의 일본산 에센스와 바꾼 뒤 “저렴하게 새 제품을 얻었다”며 만족해했다. 화장품 회사가 진행한 특별 이벤트였지만 3만5000원에 20만 원짜리 상품을 챙긴 셈이라 기쁨이 더 컸다.

최근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다 쓴 화장품 용기와 전자제품 케이스 등을 거래하는 사례가 부쩍 늘고 있다. 경제 불황 속에 싼 물건을 찾던 과거와 달리 슬기로운 방법으로 돈을 아끼고 개인적 만족을 위해 빈 용기를 사고판다.

중고 거래 사이트 ‘중고나라’에서는 하루 100여 건씩 중고 케이스가 거래된다. 화장품 용기는 물론이고 고급 양주병, 정보기술(IT) 기기 상자까지 종류도 다양하다. 이런 분위기를 반영해 제조사들도 중고 용기를 새 제품이나 적립 포인트로 교환해주는 이벤트를 열고 있다. 개당 1만 원 안팎의 빈 케이스는 새 상품을 저렴하게 구매하는 수단이 된다. LG생활건강 관계자는 “자원 절약이 화두가 되면서 정품 용기를 반납하는 소비자에게 혜택을 제공하는 화장품 제조사가 늘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해 1년 정도 사용하던 ‘아이폰6’를 중고로 판매한 맹모 씨(28·여)는 케이스 덕에 2만 원을 더 받았다. 그는 “매입 업체마다 다르지만 상자를 5000원에 구매해 신제품처럼 ‘풀 박스’를 만들면 돈을 더 준다. 나도 빈 케이스를 사서 포장해 시세보다 2만 원 더 받았다”고 말했다.

빈 병이나 상자가 ‘귀한 몸’ 대접을 받는 건 중고 거래에 대한 사회적 인식 변화 때문이다. 유현정 충북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최근 중고시장은 버려질 수 있는 재화를 활용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곳으로 바뀌고 있다”고 분석했다. 과거 싼 물건을 사고파는 데 그쳤다면 최근에는 중고를 활용해 다양한 수익을 창출하고 있다는 것이다. 유 교수는 “중고 IT 기기가 정품 케이스를 만나면 신제품처럼 느껴져 소비자의 만족도가 올라가는 것도 일종의 새로운 가치 창출”이라고 진단했다.

중고 용기 거래 시장에서는 불황 때 적은 비용으로 개인의 사치욕구를 채우는 ‘립스틱 효과’도 나타난다. 주부 이모 씨(30·여)는 외국산 화장품 병에 국내 화장품을 담아 사용한다. “평소 비싸서 구입하기 힘들었던 걸 쓰는 느낌이 든다”는 게 이유다. 이런 ‘대리만족’을 느끼는 사람들이 늘면서 일부 외국산 화장품 용기는 2만 원이 넘는 가격에 거래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고급 제품의 빈 용기 유통은 범죄에 악용될 수 있어 주의가 필요하다는 지적도 있다. 일부 유흥업소에서 남은 양주를 외국산 빈 양주병에 옮겨 담아 고가에 되파는 ‘리필 가짜 양주’가 대표적이다. 최근 가짜 화장품이나 가격이 부풀려진 중고 IT 제품 등 피해 사례도 늘고 있다.

서형석 기자 skytree08@donga.com
#고급케이스#양주병#화장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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