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황태훈]오만과 쌤통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5월 2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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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훈 정치부 차장
황태훈 정치부 차장
“오만(傲慢)의 결과다.”

한 법조계 원로가 식사 도중 쓴소리를 했다. 새누리당의 4·13총선 참패를 두고서다. 계파 간 공천 싸움 등 룰(규칙)을 지키지 않았다는 얘기였다. 그는 “총선 직전부터 이상 기류가 감지됐다”고도 했다. 여느 선거 때와 달리 주변의 보수 성향 인사들이 ‘새누리당 후보를 안 찍겠다’는 느낌이 강했다는 거다. 여당의 오만이 여소야대 정국을 불렀다는 지적이었다.

그럼에도 새누리당은 여전히 표류 중이다. ‘반성’은 간 데 없고 ‘권력 쟁투’만 진행형이다. 20대 국회 개원(30일)이 닷새 앞으로 다가왔지만 당 지도부 구성조차 안 된 상황이다. 야권과 협상이 제대로 될 리 만무하다.

친박(친박근혜)-비박(비박근혜)계 간 갈등은 위험수위를 넘어섰다. 정진석 원내대표와 지도부는 20일 비대위원회-혁신위원회 논란과 관련해 ‘혁신 비대위’로 통합하는 데에는 공감대를 형성했다. 그러나 친박계는 원내대표와 혁신 비대위원장 직의 분리를 요구하고 있다. 결국 정 원내대표는 24일 김무성 전 대표, 최경환 의원 등 각 계파 좌장과 조찬 모임에서 혁신 비대위원장을 외부에서 영입하기로 합의했다. 다만 당내 다수인 친박계가 당 주도권을 놓고 비박계와 충돌할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

“친박이 가만히 있겠느냐.”

15일 비박계 김용태 의원이 혁신위원장에 선임됐을 때 한 의원은 이렇게 반문했다. 예상은 그대로 들어맞았다. 김 의원은 선임 이틀 만에 자진 사퇴했다. 그러면서 “당내 민주주의는 죽었다”고 했다. 지난해 ‘배신의 정치’ 논란 속에 원내대표에서 물러나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고 말한 유승민 의원(무소속)을 보는 것 같았다. 모두 친박계의 전횡으로 빚어진 사건이어서다.

야권은 표정 관리 모드다. 한 야당 의원은 후배 기자에게 “후년엔 청와대에서 보자”고 말했다고 한다. 반 농담이라지만 여당의 분열을 내년 대선의 호재로 본 것이다.

현 새누리당으로는 2004년 ‘천막당사의 반전’도 기대하기 어려워 보인다. 당시 한나라당은 총선을 앞두고 천막당사에서 절치부심했다. 박근혜 대표의 전국 유세로 121석을 얻었다. 1당 열린우리당(현 더불어민주당·151석)에는 못 미쳤지만 ‘100석도 못 얻을 것’이라는 비관을 넘어섰다. 문제는 지금 새누리당에 리더가 없다는 데 있다. 차기 대권을 노리던 오세훈 김문수 후보는 야당 후보에게 맥없이 무너졌다. 김 전 대표는 총선 참패의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정 원내대표 역시 자기 주관을 지키지 못하며 지도력의 한계를 드러냈다. 당이 갈 길을 잃은 셈이다.

“우리가 남의 불행을 ‘쌤통’이라고 느끼는 이유는 거기서 얻는 이득이 있어서다.”

미국 켄터키대 리처드 H 스미스 교수(심리학)가 말하는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타인의 고통을 즐기는 감정이라는 독일어)’다.(‘쌤통의 심리학’·현암사) 잘나가던 이가 갑작스러운 고통에 빠졌을 때 ‘고소하다’고 생각하는 건 인간의 본성이다. 정치판도 마찬가지. 우리 당의 불운이 다른 누군가에겐 즐거움이 된다. 쌤통 심리는 다소 삐딱하지만 공분(公憤·공공의 분노) 대상을 향하기도 한다. 요즘 새누리당을 바라보는 국민의 심정이 그럴 것이다.

“새누리당은 10년 전 지방선거에서 참패한 책임을 두고 계파 간 갈등만 빚던 열린우리당(현 더불어민주당)을 연상케 한다.” 가상준 단국대 교수(정치외교학)는 “이런 상태로는 내년 대선도 기대하기 어렵다”고 했다. 민심을 외면한 친박 패권주의로는 보수정당의 미래도 없다는 고언(苦言)이었다.

황태훈 정치부 차장 beetlez@donga.com
#새누리당#총선 참패#친박#비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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