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스케치]때론 풍경으로, 때론 텃밭으로… 꽃이 지지 않는 나라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5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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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속 힐링의 시대… 영국 庭園엿보기

영국인들의 정원 사랑은 남다르다. 벽을 덮은 등나무 덩굴을 배경으로 빨간 장미가 돋보이는 주택가의 정원. 런던=원대연 기자 yeon72@donga.com
영국인들의 정원 사랑은 남다르다. 벽을 덮은 등나무 덩굴을 배경으로 빨간 장미가 돋보이는 주택가의 정원. 런던=원대연 기자 yeon72@donga.com
“영국의 정원은 아름답고 중요하다. 박물관이나 국립공원만큼 소중하게 간직할 가치가 있다.”

영국 왕립원예협회의 대표 정원 ‘위즐리 가든’에서 큐레이터를 맡고 있는 콜린 크로스비의 말이다. 이는 정원에 대한 영국인의 생각을 잘 대변해 준다.

정원은 영국인들의 큰 관심사다. 수많은 영국인이 매년 5월 열리는 세계 최대 규모의 원예박람회 ‘첼시 플라워 쇼’를 찾는다. 신문의 주말판에는 가드닝 기사가 고정적으로 들어간다.

런던의 집들을 살펴보면 집집마다 꾸며 놓은 정원의 수준이 대단하다. 귀족 영지의 저택에 꾸며진 정원은 물론이고 길가에서 우연히 만나는 서민들의 작은 텃밭정원까지, 영국 자체가 곧 정원이고 정원 가꾸기가 곧 영국인들의 삶인 것처럼 보일 정도다.

대체 정원 문화는 왜 유독 영국에서 이렇게 꽃을 피웠을까. 런던에서 2시간 남짓 떨어진 옥스퍼드셔 지방에서 만난 두 개의 정원을 살펴보면서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블레넘 팰리스의 바로크식 정원(맨 위 사진)과 자유분방한 풍경정원의 모습을 보여주는 외곽 정원(가운데 사진), 반즐리하우스의 텃밭정원.
블레넘 팰리스의 바로크식 정원(맨 위 사진)과 자유분방한 풍경정원의 모습을 보여주는 외곽 정원(가운데 사진), 반즐리하우스의 텃밭정원.
절대왕정에 대한 반작용, 영국식 풍경정원

블레넘 팰리스는 옥스퍼드에서 북쪽으로 15km 떨어진 곳에 있다. 넓은 호수 너머 언덕 위에 서 있는 커다란 성이 그곳이다. 성 주위 초원에서는 양떼가 풀을 뜯고 있었다. 자갈길에 세워진 아치형 문을 지나니 완벽한 대칭형 구조의 바로크풍 건물이 나타났다.

블레넘 팰리스는 윈스턴 처칠이 태어난 곳으로, 그의 조상인 말버러 공작에게 왕실이 하사한 땅에 지어졌다. 왕실의 집터가 아닌데도 궁전(palace)이란 이름을 달았을 정도로 그 당시 말버러 가문의 위세는 대단했다.

여기에 18세기 영국에서 생겨난 귀족 정원 양식의 극치인 ‘풍경정원’이 조성돼 있다. 마치 풍경화 속의 한 장면처럼 연출된, 지극히 자연스러운 정원. 하지만 사실 이 정원은 구불구불한 둘레가 수 km에 이르는 호수에서 알 수 있듯 엄청난 비용과 노력을 기울여 만든 곳이다.

정원은 마치 공원처럼 광대했다(약 8.09km²). 나무마다 초록 이끼가 덮여 있었고 덩굴식물들은 큰 나무 줄기를 기어오르고 있었다. 큰 나무, 작은 나무가 골고루 무리지어 자라는 모습은 마치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인 듯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사람 손에 의해 조율된 질서가 희미하게 드러나 있었다.

풍경정원은 당시 유럽의 절대 권력을 쥐고 있던 프랑스의 바로크 양식에 대한 반항이었다는 전문가의 의견이 있을 정도로 파격적이었다.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의 정원이 극명하게 보여 주는 바로크 양식 정원은 식물조차도 선에서 벗어나지 않는 철저한 통제와 규격, 정형이 특징이었다. 풍경정원은 이 모든 통제를 과감하게 깨뜨리며 제멋대로 구불거리고 휘어지는 ‘자유의 정원’이었다.

이 양식은 화가인 윌리엄 켄트의 의해 본격적으로 나타나 훗날 랜슬럿 브라운에 의해 절정을 맞았다. 그는 ‘능력자 브라운’이란 별명으로 불릴 정도로 인정받는 전문가였다. 영국의 수많은 정원을 풍경정원으로 리모델링했고, 이런 정원 중 일부는 오늘날 골프장의 모습으로 고스란히 남아 있다.

블레넘 팰리스의 정원도 브라운의 대단한 능력에 의해 리모델링됐다. 이 커다란 정원을 유지하기 위해 15명의 정원사가 상주한다. 매년 소요되는 경비만 100만 파운드(약 16억4000만 원)에 이른다.

영국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수선화.
영국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수선화.
소박하지만 아름다운 서민의 텃밭정원

19세기 초 영국의 언론인이자 정원사였던 윌리엄 로빈슨은 ‘영국식 코티지 가든(텃밭정원)’이라는 개념을 소개했다. 그는 야생화가 흐드러지게 피고 지는 가운데 먹을거리가 되는 채소와 과실수가 자라는 이 정원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원이라고 역설했다.

사실 이런 정원은 로빈슨이 처음 만들어 낸 것이 아니다. 영국 서민들이 아주 오랜 세월 자신의 앞마당에서 꾸며 온 정원이었다. 텃밭정원은 누가, 언제부터 만들었는지 기원을 찾을 수 없다. 먼 옛날부터 할머니와 어머니, 딸로 이어져 온 영국 전통의 문화유산이다.

여하튼 로빈슨의 기사로 인해 서민들이 삶 속에서 만들어 낸 꽃과 채소의 정원이 폭발적인 관심과 유행의 대상이 됐다. 그리고 이 문화는 ‘보여 주기식’ 정원에만 집중하던 귀족들의 마음을 흔들었고 귀족들의 저택에도 텃밭정원이 생겨났다.

런던에서 서북쪽으로 2시간을 가면 동화 속 같은 풍경을 가진 코츠월드 지역이 나타난다. 이곳에는 수백 년 된 전통 가옥들이 보존돼 있다. 코츠월드에 있는 보통 사람들의 집 정원이 바로 로빈슨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원이라고 극찬했던 영국식 시골 정원, 즉 텃밭정원이다.

코츠월드의 끝자락인 반즐리 마을에 다다르니 로즈메리 비어리의 정원이 있었다. 비어리는 1990년대에 활약한, 영국의 유명한 정원 디자이너 중 한 명이다. 1697년에 지어진 건물을 둘러싸고 펼쳐진 11에이커(약 4만4500m²)의 정원은 매듭 모양의 ‘노트(knot) 가든’과 잔디밭, 분수 등 유명한 영국 정원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요소들로 구성돼 있었다. 그렇지만 역시 압권은 코티지 가든을 좀 더 그녀의 취향대로 현대적으로 해석한 텃밭정원이었다. 붉은 벽돌로 텃밭에 길을 내고, 기하학적 문양으로 밭을 쪼개 갖가지 꽃과 채소를 함께 심어 놓았다.

그녀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정원 안에서는 레스토랑과 호텔이 운영되고 있었다. 텃밭에서 재배한 채소로 만들어지는 음식 또한 정원이 자랑하는 또 하나의 매력이란 생각이 들었다.

한동안 우리나라에서 미국인 타샤 튜더의 삶과 그녀의 정원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런데 튜더는 영국에선 유명하지 않다. 모든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튜더의 삶을 살고 있고, 그녀가 재현하려고 했던 19세기 영국인들의 삶이 아직도 꾸준히 이어져 오고 있기 때문이다. 귀족이니 서민이니, 잘사느냐 못사느냐에 상관없이 자신의 집에 정원이 있다는 게 전혀 특별하지 않고, 자식들 공부보다는 내 집에 어떤 식물이 자라고 있는지를 더 자랑하는 사람들. 그 속에서 영국이 왜 세계 정원 문화의 메카가 되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정원이 아름다운 영국 관광지는 www.visitbritain.com에서 찾아볼 수 있다.

▼먹고살기도 힘든데 무슨 庭園이냐고요?▼

가든디자이너 오경아의 ‘정원의 속삭임’


금요일 오후 8시 반, 영국 공영방송 BBC의 제2텔레비전 채널. 세 명의 유명 정원사가 등장해 다음 주 정원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날지, 정원을 어떻게 꾸미고 관리할지 등을 소개한다. 프로그램 이름은 ‘가드너스 월드’다.

금요일 오후 8시 반이라는 시간은 절묘하다. 바로 다음 날부터 주말이고, 사람들은 주말을 이용해 정원에서 하루 종일 시간을 보낼 것이기 때문이다. 영국 거리에서 흔히 눈에 띄는 ‘워터스톤스’란 체인서점에 들어서면 한복판, 눈에 가장 잘 띄는 장소에 ‘가든’ 섹션이 있다. 가든디자인, 식물학 정보, 에세이 등 정원에 관련된 책들을 총망라하는 곳이다. 편의점의 잡지 가판대에서도 정원 관련 책들이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다. 내가 영국에 머물렀던 6년 동안 살았던 곳은 영국인들도 이름을 대면 거기가 어디냐고 되묻는 정말 작은 시골 마을이었다. 마을 중심가에는 주민 대부분이 장을 보는 슈퍼마켓이 2곳 있었다. 그런데 이 슈퍼마켓보다 더 큰 ‘가든센터’라는 곳이 인근에 무려 세 군데나 있었다.

가든센터는 정원에 필요한 식물과 화분, 벽돌, 바닥재 등을 파는 곳이다. 간단한 음식과 차도 판다. 주중에는 도통 볼 수 없는 주민들을 나는 이 가든센터에서 자주 만나곤 했다. 그들은 물건을 사지 않아도 차를 마시고, 샌드위치를 사 먹고, 잘 꾸며 놓은 정원을 산책하며 시간을 보내곤 했다.

통계조사에 의하면 영국인들이 1년 동안 정원용품을 사는 데 쓰는 비용이 8조 원이라고 한다. 여기에는 정원을 조성하는 데 드는 건축비용과 정원 관리에 필요한 인건비는 빠져 있다. 내가 경험한 영국의 정원 문화는 단순한 취미 생활의 차원을 뛰어넘는 산업의 현장이었고, 경제의 한 축이었다.

요즘 우리에게도 정원에 대한 관심이 열풍처럼 불어옴을 느낀다. 그런 가운데 가끔은 먹고살기도 힘든데 무슨 정원이냐고, 마음에 부는 바람을 애써 죽이는 걸 본다. 나는 정원이 정말 먹고살기 좋아야만 할 수 있는, 문화적 호사가 아님을 영국인들의 소박한 삶 속에서 얼마든지 봤다.

개인적으로는 섣부른 확신을 해본다. 정원 문화의 정착이 분명 우리 삶을 조금은 더 행복하게 해줄 것이라고 말이다. 그래서 요즘 늘고 있는 정원에 대한 관심이 한때 강하게 몰아치다 사라지는 유행이 아니라 문화와 사회, 그리고 우리 마음속에 잔잔하지만 깊게 뿌리 내리기를 바란다.

도움말=오경아 가든디자이너

옥스퍼드·코츠월드=원대연 기자 yeon72@donga.com
#정원#영국#장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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