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김정훈]잃어버린 20년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9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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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훈 사회부장
김정훈 사회부장
해양수산부에는 ‘항만국 통제점검관’이라는 직책이 있다. 국내 항만에 들어온 외국 선박에 안전상의 문제는 없는지, 바다 오염을 일으킬 만한 소지는 없는지 등을 검사해 문제가 있으면 출항정지를 시킬 수 있는 자리다. 외국 선박의 입장에서 볼 때는 막강한 권한을 휘두르는 사람이다. 대부분의 외국 선박이 화물선이니, 출항정지 조치라도 당하면 제 날짜에 화물을 운반하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질 수 있다.

한 달 전인 8월 22일 부산지법은 항만국 통제점검관으로 근무했던 해수부의 한 6급 공무원에게 징역 3년의 실형을 선고했다. 2012년 충남 서산의 대산항에서 점검관으로 근무할 때 출항정지에 해당하는 결함을 적발하고도 이를 눈감아주고 외국 선박들로부터 뇌물을 받았다는 것이 그의 혐의다. 그는 거의 2, 3일 사이로 뇌물을 받아 챙겼다. 5월 30일 처음으로 외국 국적 액화석유가스(LPG) 운반선 선주에게서 1만 달러를 받은 데 이어, 7월 20일 태국 국적 선박으로부터 7600달러, 7월 23일 홍콩 국적 선박으로부터 1만 달러, 7월 26일 1만5000달러, 7월 27일 700만 원을 차례로 받은 것이다. 수법도 아주 나빴다. 점검 결과 출항정지 대상이 된 외국 선박 측에 점검보고서 초안을 먼저 보여주고 돈을 요구한 뒤 돈이 계좌에 입금되면 출항정지를 풀어주는 식이었다.

그에겐 징역 3년의 실형과 함께 벌금 1억2000만 원, 추징금 5653만 원이 선고됐다. 벌금형에는 일당 12만 원을 기준으로 노역장 유치명령이 났으니 벌금을 내지 않을 때는 징역 3년에 또 3년 정도(1000일)를 더 감옥에서 지내야 한다.

재판부는 이렇게 선고하면서 “금품을 요구한 상대방이 외국 국적 선박이라는 점에서 우리 공공기관의 청렴성에 대한 외국인의 신뢰도를 저하시켜 국익에 악영향을 끼칠 우려가 있어 엄중한 처벌이 필요하다”고 판결문에 적었다. 이 공무원에겐 안전상의 결함이 발견된 선박이 운항을 하다 좌초를 하든 말든 안중에도 없었던 것 같다.

세월호 참사 이후 국가대혁신이 화두가 되자 많은 국민은 ‘부패 척결’을 가장 큰 과제로 꼽았다. 본보가 7월 일반 국민 800명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에서 응답자들은 우리 사회의 문제점으로 ‘뿌리 깊은 부패’(67.4%)를 가장 우선적으로 꼽았다. 세월호 참사가 직접적으로는 신속하게 승객을 구조하지 못한 데서 빚어졌지만, 그 이면에는 화물 과적을 묵인하고 뒷돈이 오가면서 승객의 안전이 무시됐던 부패 구조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지 5개월이 지났지만 국가대혁신의 과제들은 ‘출항정지’ 상태에 놓여 있다. 대혁신의 과제들을 하나하나 풀어 나가야 할 정치권과 국회는 문을 걸어 닫은 채 시간만 보내고 있다. 오히려 그 와중에 부정부패 혐의가 적발된 동료 의원의 체포동의안을 눈 딱 감고 부결시키는 강심장을 보이기도 했다.

우리 사회의 부패 문제는 1993년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면서 처음으로 해결의 기미를 보였다. 공직자 재산신고제가 도입됐고, 두 전직 대통령이 뇌물죄로 구속되면서 이렇게 하면 우리 사회도 정말 깨끗해지겠구나 하는 기대감이 컸다. 하지만 정치적 바람몰이로 진행된 부패 청산은 내실 있게 제도화되지 못했고 도리어 현직 대통령의 아들이 비리로 구속되는 비극으로 결말이 났다.

이후 20년의 세월이 흘렀고 그 사이 많은 분야에서 투명하고 공정한 시스템들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국민은 부패 척결을 최대의 미해결 과제로 꼽을 만큼 그 만족도는 높지 않다. 윗물인 정치권이 분탕질을 치는데 아랫물이 깨끗해질 리도 없다. 국민의 뜻이 모아진 지금 강력한 부패 예방시스템을 갖추지 못한다면 ‘잃어버린 20년’을 되찾을 기회는 없다.

김정훈 사회부장 jnghn@donga.com
#해양수산부#항만국 통제점검관#뇌물#세월호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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