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현대는 모든 것이 리얼리티 쇼”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8월 1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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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충격/더글러스 러시코프 지음·박종성 옮김/380쪽·1만6000원·청림출판

청림출판 제공
청림출판 제공

인기 오락 TV프로그램인 ‘개그콘서트’는 코너당 최대 5분의 시간이 주어진다. 이 시간 안에 관객들을 웃기지 못하면 다음 방송분을 기약할 수가 없다. 전통적인 서사(내러티브) 방식으로는 도저히 승부를 걸 수 없고 순간순간 유머를 터뜨려야 살아남는다.

반면 1980년대 코미디 프로그램 ‘유머 일번지’는 서사식 콩트가 대부분이었다. 전후 맥락을 이해해야 웃을 수 있다는 뜻이다. 이를테면 김형곤이 회장으로 출연한 ‘회장님 회장님 우리 회장님’은 비룡이라는 재벌그룹 회의실을 배경으로 정치, 사회 현상을 풍자해 눈길을 끌었다. 회장 역의 김형곤이 한 임원에게 “저거 처남만 아니면 (자르는 건데)…”라고 면박을 주는 장면은 ‘정실 인사’로 점철된 우리 사회를 은근히 꼬집는다.

유머 일번지에서 개콘으로 코미디의 코드가 바뀐 것처럼 이 책은 순간순간의 흐름에 집착하는 최근의 사회 문화적 흐름을 짚었다. 원제목 ‘Present Shock’는 미래학의 대표작인 앨빈 토플러의 ‘미래 쇼크(Future Shock)’를 교묘하게 비틀었다. 미래학자들이 상상한 미래가 이제는 현실이 되었는데, 정작 사람들은 눈앞에 쏟아지는 온갖 정보의 흐름을 쫓아가는 데 급급한 상황이다.

더글러스 러시코프
더글러스 러시코프
e메일과 트위터 피드, 페이스북 업데이트 등이 스마트폰 알림을 통해 쉴 새 없이 우리 삶을 파고드는 사이 반성과 숙고는 잊혀져 간다. 전통적으로 정보를 전달하는 주된 수단이던 ‘스토리텔링’마저 들어설 여지를 주지 않는다. 저자는 “우리가 도달한 미래에서 스토리가 산산이 흩어졌으며 ‘현재 충격’의 징후를 겪기 시작했다”고 진단한다. 예컨대 범죄 과정은 물론이고 동기까지 찬찬히 규명하는 ‘셜록 홈스’를 대신해 살인이 벌어진 순간을 최첨단 컴퓨터 그래픽으로 재연하는 미드(미국드라마) ‘과학수사대(CSI)’가 각광을 받는다.

이 과정에서 플롯 사이의 개연성도 묻히기 십상이다. 큰 성공을 거둔 미드 ‘프렌즈’는 1회부터 같은 동네 커피숍에 우연히 모인 동갑내기들이 시시껄렁한 농담을 건네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들이 왜 모였는지, 과거가 어땠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스토리가 형해화된 가장 극단적인 사례는 ‘리얼리티 쇼’다. 정해진 각본이나 대사 없이 특정한 상황에 사람들을 모아놓고 카메라만 돌리면 된다. 여러 명의 작가와 배우들을 쓸 필요가 없다 보니 방송사는 비용을 아낄 수 있다. 그러나 시청자들의 말초신경을 자극하기 위해 출연자 개인의 불행을 이용하는 등 프로그램의 질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뉴스도 ‘현재의 충격’에서 벗어날 수 없다. 24시간 실시간 뉴스를 공급하는 CNN이 시시각각 변하는 상황을 날것 그대로 전달하자 정치권은 신속한 결정을 해야만 했다. 이 때문에 정부는 특정 이슈를 진득하게 연구하지 못하고 임기응변으로 대응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저자는 무엇보다 정보기술(IT)이 자아를 분열시키는 ‘디지털 분열’을 우려한다.

저자는 오전에 무인공격기로 중동지역을 폭격하고 저녁에 집에 돌아가 가족들과 식사하는 조종사들의 삶을 예로 든다. 조사 결과 이들은 실제 전쟁터에 나간 군인들 이상으로 정신적 불안과 스트레스를 겪고 있었다. 사람을 죽이는 군인과 아기를 품는 아버지라는 두 가지의 정체성을 동시에 조화시키는 게 그만큼 힘들어서다.

사람은 컴퓨터처럼 완벽하게 멀티태스킹을 수행할 순 없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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