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주류경제학을 뒤흔든 비주류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2월 2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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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라파와 가격이론/알레산드로 롱칼리아 지음/박만섭 옮김/500쪽·3만 원·아카넷

이탈리아 출신의 경제학자 피에로 스라파(1898∼1983)는 1960년대 신고전파 경제학의 ‘한계주의 접근법’의 논리적 오류를 비판하며 ‘잉여 접근법’에 기초한 이론체계를 구축해 1930년대 ‘케인스 혁명’에 이어 1960년대 ‘스라파 혁명’을 끌어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아카넷 제공
이탈리아 출신의 경제학자 피에로 스라파(1898∼1983)는 1960년대 신고전파 경제학의 ‘한계주의 접근법’의 논리적 오류를 비판하며 ‘잉여 접근법’에 기초한 이론체계를 구축해 1930년대 ‘케인스 혁명’에 이어 1960년대 ‘스라파 혁명’을 끌어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아카넷 제공
이탈리아 출신의 경제학자 피에로 스라파(1898∼1983)는 여러모로 독특한 인물이다. 유명한 공산주의자 안토니오 그람시의 절친이었으며, 존 메이너드 케인스의 초청으로 찾아간 케임브리지에서 평생을 사서(교수가 아니다!)로 일하면서 ‘고전파 경제학의 아버지’ 데이비드 리카도의 전집을 편찬했다. 오랜 숙성 기간을 거쳐 예순이 넘은 나이에 출간한 유일한 저서 ‘상품에 의한 상품생산’(1960년)은 그 흔한 현학적 서론 하나 없이 본론으로 단도직입, 겨우 100쪽 남짓한 분량으로 주류 경제학의 근본을 뒤흔들어 버렸다.

셰익스피어가 쓴 형용사 하나만 바꿔도 셰익스피어답지 않게 된다 했던가? 스라파를 읽을 때면, 군더더기라고는 단어 하나도 찾기 어렵고 어떤 사소한 논리적 오류도 허용하지 않으려는 완벽주의에 맞닥뜨리게 된다. 논리철학자 비트겐슈타인에게도 영향을 주었다는 일화를 보면, 수식과 건조한 문체로만 구성된 그의 책은 예사롭지 않게 읽힌다.

그러나 스라파는 미국 경제학의 압도적인 영향 아래에 놓인 한국 경제학계에서는 잊힌 이름이다. 비판을 위해 가끔 언급되는 마르크스보다도 홀대받는다는 의미에서 ‘비주류의 비주류’인 셈이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스라파가 주류경제학이 외면하고픈 ‘불편한 진실’을 다루기 때문일 것이다. 예를 들면, 스라파의 엄밀함으로 무장한 영국 케임브리지 경제학자들이 미국 케임브리지(하버드와 MIT가 있는 곳) 경제학자들을 논파했던 1960, 70년대 ‘자본논쟁’은 주류경제학이 논리적 오류에 기초함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그럼에도 주류경제학은 “굳이 따지자면 네 말이 맞지만, 일단 우리가 옳다 치고…”라는 태도로 제 갈 길을 갔다. 주류가 장악한 학문 권력의 힘이었다.

1970년대 초반 ‘스라파 삼촌’에게 직접 배우러 케임브리지를 찾아간 이탈리아의 젊은 경제학자 알레산드로 롱칼리아(67·현 로마제1대 정치경제학 교수)는 수학을 거의 사용하지 않으면서도 스라파가 경제 분석에 미친 영향을 요령 있게 설명한다. 극단적인 스라파주의자들과 달리 마르크스 경제학까지도 보듬는다. 마치 롱칼리아의 책이 본편이고, 자기과시에 엄격한 스라파의 책은 그것을 엄밀하게 정리한 논리학적 부록인가 싶을 정도이다. 롱칼리아는 자원의 희소성과 합리적 선택 및 수요와 공급의 균형이라는 틀이 아니라, 자본주의 경제가 끊임없이 재생산돼야 한다는 것,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잉여가 이윤이라는 것, 바로 고전파나 마르크스가 중시한 객관적 관점의 복권이 스라파 혁명의 진정한 핵심임을 설득력 있게 논증한다.

류동민 충남대 교수(경제학)
류동민 충남대 교수(경제학)
필자는 옮긴이(박만섭 고려대 교수)와 여러 차례 일한 경험이 있다. “책을 읽었으면 지은이를 만나지 말고, 지은이를 알면 책을 읽지 말라”는 격언은 적어도 번역의 경우에는 틀린 말이다. 번역자 개인의 성실함과 전문성이 전제되지 않으면(전문성이 결여된 성실함이 가장 위험하다!), 자칫 독자들은 원어와 한국어의 경계, 그 생경한 곳에서 허우적거리다가 저 멀리 안드로메다로 보내지곤 한다. 거의 본문과 맞먹는 분량의 성실하고 전문적인 해설은 한낱 번역서를 놀랍게도 옮긴이 자신의 훌륭한 저서로 바꿔 놓았다. 경제학에서 사용하는 행렬대수학의 기본은 물론이고 최근 연구 동향까지 한 권에 담은 이 자기완결적 저서에 대해 질투 섞인 경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류동민 충남대 교수(경제학)
#스라파와 가격이론#피에로 스라파#미국 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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