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뛰느냐 죽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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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8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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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와 황홀, 육상/김화성 지음/244쪽·1만5000원·알렙

표범은 인간보다 훨씬 빠르지만 금세 지친다. 인간은 맨살의 피부와 땀샘 덕에 오랜 시간 달릴 수 있었고 이를 이용해 상대적으로 
약한 몸으로도 강한 짐승을 잡아먹고 살 수 있었다. 나미비아의 브란트베르크 산맥에서 발견된 벽화. 알렙 제공
표범은 인간보다 훨씬 빠르지만 금세 지친다. 인간은 맨살의 피부와 땀샘 덕에 오랜 시간 달릴 수 있었고 이를 이용해 상대적으로 약한 몸으로도 강한 짐승을 잡아먹고 살 수 있었다. 나미비아의 브란트베르크 산맥에서 발견된 벽화. 알렙 제공
모든 스포츠엔 원시 사냥의 흔적이 녹아 있다. 먹잇감을 쫓다 보면(달리기), 개울을 훌쩍 뛰어넘어야 하고(멀리뛰기, 장대높이뛰기), 강을 건너(수영, 카누, 카약), 돌(포환, 해머, 원반)을 던지거나 창 혹은 화살(양궁, 사격)을 날려야 한다. 때론 먹잇감과 드잡이(펜싱, 레슬링)를 벌인다. 이처럼 스포츠는 ‘인간이 살기 위해 몸부림 쳤던 흔적’을 담고 있다. 그 기본이 바로 육상이다. 달리고, 뛰고, 던지는 동작 없이 이뤄지는 사냥이나 스포츠는 거의 없다.

그럼에도 한국인들 머릿속에 육상은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했다. 마라톤을 제외하고는 세계무대에서 큰 성과를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달라져야 할 시간이다. 월드컵, 올림픽과 함께 세계 3대 스포츠대회로 불리는 2011 대구 세계육상선수권대회가 27일부터 다음 달 4일까지 열리기 때문이다.

동아일보 스포츠 전문기자이자 ‘육상 왕초 기자’로 불리는 저자는 “막대기를 들고 도랑물을 건너뛰고, 들개처럼 온 들판을 뛰어다니며, 돌을 던져 물수제비를 뜬 것까지, 어릴 적 뒷동산에서 뛰어놀던 그 몸짓들이 이제 돌이켜보니 하나하나 육상 아닌 게 없다”며 “육상은 인간 본능에 충실한 가장 매력적인 스포츠”라고 강조한다. 원시 사냥부터 현대 육상 영웅들의 레이스, 한국 육상의 역사 등을 담은 이 책을 쓴 것도 육상을 갈구하는 우리의 본능을 다시금 자극하기 위해서다.

책은 총 3부로 구성했다. 1부 ‘인간은 왜 달리고 뛰고 던지는가’에서는 인류 육상의 기원을 원시 사냥에서 찾고, 왜 최근에는 아프리카 출신 선수들이 세계 육상을 휩쓰는지를 문화인류학적, 신체적, 경제적 이유 등을 들어 설명한다.

케냐인들이 달리기를 잘하는 까닭은 케냐 칼렌진 족의 ‘소 도둑질’ 전통 덕분이다. 이 종족 남자들이 결혼하려면 소 두세 마리는 훔쳐 와야 한다. 걸리면 곧바로 죽음. 따라서 최고 마라토너만이 아내를 얻을 수 있다. 수백 년 동안 가장 잘 달리는 유전자만 살아남았고, 오늘날 케냐 선수들이 그 유전자를 이어받았다는 설명이다.

게다가 아프리카 흑인들의 엉덩이는 백인이나 황인에 비해 빵빵하다. 학자들은 이런 엉덩이 근육을 ‘파워 존’이라고 부르는데, 여기서 순간적이면서 강력한 힘이 분출된다. 또 흑인들은 단거리에 적합한 속근 섬유질 근육이 더 발달된 반면, 황인이나 백인들은 오래 달리는 데 적합한 지근 섬유질 근육이 더 발달했다는 것이다.


2부 ‘한국 육상 만상(萬象)’에서는 구한말 육상이 처음 도입됐던 시기 유교 전통과 부닥쳐 생긴 각종 에피소드와 민족의 영웅 손기정에서 황영조, 이봉주로 이어지는 한국 마라톤 중흥시대를 소개한다. 또 한때 세계 최고였던 한국 마라톤이 최근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이유가 마라톤의 스피드화(化)에 있다고 분석했다. 평평한 코스와 최첨단 운동화가 개발되면서 현대 마라톤은 단거리의 확대판이 됐다. 마라톤도 100m 경기처럼 빨리 달려야 우승할 수 있다. 따라서 순간적이면서 강력한 힘을 내는 흑인들에게 마라톤의 왕좌를 물려주게 된 것이다.

3부 ‘종목을 즐기기 위해 알아두면 좋은 육상 잡학 소사전’과 별책부록 ‘육상경기 종목별 관전 가이드북’에서는 실제로 육상 경기를 관람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팁과 상식을 정리했다. 책 중간 중간 친절한 삽화가 들어 있어 보는 재미를 더했다.

이 책은 육상의 매력을 인문학적으로 해석한 데다 한국 및 세계 육상계에서 벌어진 각종 에피소드를 다양하게 실어 쉬우면서도 흥미롭게 읽힌다. 대구 세계육상선수권대회가 열리기 전 이 책을 읽는다면, 세계적 스포츠 축제를 더욱 재밌게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우사인 볼트의 엉덩이 근육을 더 유심히 쳐다볼게 될지도 모른다.

단 한국 육상을 다루면서 마라톤에만 치우친 점은 아쉬움을 준다. 친구이자 라이벌인 ‘천재형’ 황영조와 ‘끈기형’ 이봉주의 비교 분석도 기시감이 느껴진다. 반만 년 한국 역사에서 육상이 어떤 지위를 차지했는지, 또 근대 육상 도입 후 알려지지 않은 육상계 뒷이야기나 최근 떠오르는 한국 육상 신예들의 이야기를 추가했더라면 더 좋았을 듯하다.

이 책을 읽고 나면 한강 둔치를 달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된다. ‘러너스 하이’라는 용어가 있다. 장시간 달린 후 고통이 정점을 찍을 때 갑자기 찾아오는 짜릿한 쾌감이나 도취감을 말한다. 이걸 한번 느끼면 달리기의 매력에서 헤어 나올 수 없다. 기자도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지난해 가을 잠실대교에서 반포대교까지 한강 둔치를 쉬지 않고 달렸다. 자전거를 탄 남편이 천천히 페달을 밟으며 페이스메이커 역할을 해줬다. 반포대교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가슴은 두근거렸고 하체의 뻐근한 느낌마저 충만한 기쁨으로 다가왔다.

체코의 육상 영웅 에밀 자토페크는 말했다. “새는 날고, 물고기는 헤엄치고, 사람은 달린다.”

이지은 기자 smile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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