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명나라 가면 부르는 값 반은 무조건 깎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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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7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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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사람의 세계여행/규장각한국학연구원 엮음/432쪽·2만3800원·글항아리

1748년 일본을 방문한 제10회 조선통신사 행렬을 그린 ‘조선통신사 내조도’. 당시 조선은 일본에 대해 문화적 우월감에 차 있었다. 하지만 통신사 일행 중 발전된 일본문화를 직접 접한 후 충격을 받은 이도 적지 않았다. 글항아리 제공
1748년 일본을 방문한 제10회 조선통신사 행렬을 그린 ‘조선통신사 내조도’. 당시 조선은 일본에 대해 문화적 우월감에 차 있었다. 하지만 통신사 일행 중 발전된 일본문화를 직접 접한 후 충격을 받은 이도 적지 않았다. 글항아리 제공
“중국에 가서 물건을 살 때는 부르는 값의 반을 깎아야 한다.”(조선시대 중국어 학습서 ‘노걸대’)

“(조선인들은) 오래된 술, 소주 등 대체로 술 종류는 모두 좋아함.”(조선통신사를 접대하기 위해 마련해놓은 대마도 사람들의 매뉴얼)

“동생 한 명을 팔아 부귀영화를 누렸으면 되었지, 남아있는 동생마저 (살린 후 중국에) 팔려고 약을 주는가?”(세종실록 9년, 한확이 명나라 진헌녀로 가게 된 여동생의 병문안을 가서 약을 주자 동생이 울부짖으며 외친 말)

일단 높은 값을 부른 후 상대의 반응을 봐가며 에누리를 해주는 중국 상인의 관행은 600년 전에도 마찬가지였다. 한국인들이 유난히 술을 좋아하는 것도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 듯하다. 딸이나 누이를 통해 출세하려는 남자들의 모습도 낯설지 않다. 조선인들의 바깥세상 나들이를 소개한 이 책은 소소한 일화들이 지금 사는 모습과 겹쳐져 더욱 흥미롭다. 조선시대 삶과 문화를 다각도로 살펴본다는 취지로 시작된 규장각 교양총서 다섯 번째 책이다.

제주에서 표류해 중국 강남을 여행한 후 ‘표해록’을 남긴 최부(1454∼1504), 중국 베이징으로 사행을 다녀온 실학자 홍대용(1731∼1783), 러시아 사절단으로 미국 뉴욕까지 둘러본 민영익(1860∼1914), 조선 여인으로는 최초로 유럽과 미국 여행을 떠난 나혜석(1896∼1948) 등 고려 말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조선인들이 경험한 다양한 형태의 12가지 세계여행기를 담았다.

이들의 여행이 오늘날과 같은 의미일 수는 없다. 교통수단이 발달하지 않은 상황에서 먼 길을 떠나는 여정은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었고, 살아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자의보다 타의로 이뤄진 경우가 많았다. “사당에 참배하고 어머님께 가서 작별을 고했다. 어머님께서는 눈물을 머금고 차마 말을 잇지 못하신다. 나 역시 눈물이 흐르고 목이 메어 슬픔을 억제하기 어렵다.…두 아이는 내 옷자락을 붙잡고 슬피 울고, 아내는 얼굴을 가리고 흐느껴 운다.”(1682년 조선통신사로 일본에 가는 역관 김지남이 남긴 글)

조선 초까지 조공무역의 일환으로 중국에 ‘팔린’ 공녀들의 해외여정은 지옥이나 다름없었다. 이들은 눈물로 일생을 보냈다. 황제가 죽으면 순장되거나 현지 국난에 연루돼 비참하게 죽기도 했다. 그러나 딸이나 누이가 공녀가 되면 조선에서는 그 가족에게 관직과 재물을 내려 위로했다. 여동생 두 명을 명나라로 보낸 한확(1403∼1456)은 이후 우의정 좌의정 등 요직을 두루 거치며 청주 한씨 가문을 조선 전기 최고 명문으로 만들었다.

비록 가기 싫은 길을 억지로 떠났다고 해도 이들이 만난 새로운 세상은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노걸대’의 주인공은 물건 팔러 중국에 갔다가 그곳 풍습까지 섭렵했고 홍대용은 성당에 들러 파이프오르간을 연주하고 망원경으로 태양을 관측했으며 조선통신사 일행은 일본의 번성한 출판문화와 화려한 도시문화를 접했다. 이런 경이로운 경험과 감상을 이들은 생생하게 글로 남겼다.

지식인의 냉철한 시각과 식민지 출신자로서의 고뇌가 동반된 연희전문 교수 이순탁(1897∼?)의 세계일주는 특히 눈길을 끈다. 수십만 권의 책을 불태우는 ‘현대판 분서’를 자행한 히틀러가 오래가지 못할 것임을 예감하고 대공황에 대처하는 세계열강의 자세를 유심히 관찰한다. “영국에서 교육받아도 미얀마 사람이면 신사가 아니다”라는 일본 여고생의 말에 동조하다가 문득 자신의 처지를 반추한다.

이 책은 어렵고 지루할 수 있는 사료를 알기 쉽게 풀어냈을 뿐만 아니라 고지도와 삽화, 사진을 충분히 담아 ‘보는 재미’를 더했다. 대중 역사서의 갈 길을 고민한 필진의 노력이 느껴진다.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우리 조상들이 남긴 ‘원본’ 자체가 흥미롭기에 가능한 작업이 아니었을까. 러시아 사절단 중 한 명인 윤치호의 글을 보면 절로 웃음이 난다. “Mr. Min(민영환)은 전형적인 조선의 양반이다. 그는 모든 일에 하인의 봉사를 필요로 한다.…나는 그가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잠자고 먹을 수 있는지 의심스럽기도 하다.” 모스크바에서 레닌을 만난 뒤 적은 여운형의 글에선 냉철하면서도 뜨거운 마음이 느껴진다. “조선의 상황은 공산주의보다는 민족주의를 실행하는 편이 낫다는 레닌의 말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오늘날 세계여행은 조선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자유로워졌다. 조선인들이 그 어려운 상황에서도 여행기를 적어 후대에 남겼듯이 우리 역시 눈과 마음속에 담은 여행담을 글로 남기면 어떨까. 그리스의 작은 섬에 사는 무명의 예술가가 우연히 만든 조각품 ‘밀로의 비너스’가 고대 여성미를 표상하게 됐듯 우리가 남긴 여행기가 1000년 후 ‘한국 사람의 세계여행’이라는 책에 담길지도 모를 일이다.

이지은 기자 smile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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