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리뷰]30년 단역배우, 인생무대의 주연 맡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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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5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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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삼류배우’
대본★★★☆ 연기★★★☆ 연출★★★ 무대★★★

단역 배우 이영진(앞·정해균)은 무대에서
도 현실의 삶에서도 초라하기만 하지만
언젠가 햄릿으로 무대에 서겠다는 꿈을
버리지 않는다. 극단 미연 제공
단역 배우 이영진(앞·정해균)은 무대에서 도 현실의 삶에서도 초라하기만 하지만 언젠가 햄릿으로 무대에 서겠다는 꿈을 버리지 않는다. 극단 미연 제공
같은 학교를 다녀 얼굴만 아는 초등학교 동창이 연극배우가 됐다는 걸 한참 뒤에 알았다. 그가 비중 있는 조연으로 출연한 영화를 한 번 본 적이 있을 뿐이지만 “친구 ○○○가 배우야”라고 주변 사람에게 가끔 자랑도 한다. 그가 나이 마흔이던 지난해 결혼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하지만 요즘 무대에서도, TV나 영화에서도 그 친구의 모습을 볼 수가 없다. 그는 어디에서 뭘 하고 있을까.

연극 ‘삼류배우’(김순영 작·연출)를 보고 그 친구가 떠올랐다. 배우라는 강한 이미지 이면에 팍팍하고 고단한 삶을 살아 왔을 그의 삶에 비로소 마음이 갔다. 삼류 배우는 30년간 단역배우만 해온 이영진(정해균)의 삶을 응축해 사실적으로 보여줘 관객의 감정선을 건드리는 데 성공한다. 극 막판부터 옆에 앉아 있던 20대 후반의 여성 관객은 연방 눈물을 훔쳤다.

나이 49세의 이영진은 고교를 졸업한 뒤 연극판에 뛰어들어 30년간 무대를 지켰지만 주연을 맡아 본 적이 없다. 대학생 딸 진경(홍리나)과 고등학생 아들 진호(전승우)는 그런 아버지를 ‘삼류 배우’라고 흉본다. 자식들에게 아버지는 생활환경기록부 부모 직업란에 ‘배우’라고 쓰기에도 창피한 존재. 생계도 미용실을 운영하는 아내 지숙(박호석)이 책임진다.

그런 이영진이 평생의 꿈인 햄릿 역을 맡을 기회를 잡는다. 극단의 연출가에게 사정해 햄릿 역을 약속받은 것. 하지만 “똥배우 주연시키면 작품망치는 거 몰라. 나보고 뭘로 관객을 모으라는 거야”라고 제작자가 극렬하게 반대해 물거품이 된다.

드라마에 출연하며 인기를 얻은 같은 극단 동기 전상일(안태랑)이 대신 햄릿을 맡고 이영진에겐 다시 단역이 주어진다. 제작자는 녹화 스케줄로 하루 펑크를 내게 된 전상일 대신 딱 한 번만 햄릿을 맡아 달라고 그에게 간곡하게 부탁하고도 공연 직전 우여곡절 끝에 극장에 도착한 전상일에게 다시 햄릿을 맡겨 이영진의 마음을 찢어놓는다. 결국 이영진은 극이 끝나고 모두 퇴장한 무대에서 가족만을 위한 특별 공연을 펼친다.

과연 배우는 배우다. 극 막판까지 삼류 배우처럼 초라하고 어설프게만 보이던 이영진은 마지막 햄릿을 연기하는 순간엔 일류배우처럼 환하게 빛난다. 극중 단역 배우 출신의 노배우(이성용)가 “한 번밖에 설 수 없는 인생의 무대에서 자네가 맡은 역은 주인공이야”라고 위로하는 대목은 관객의 마음까지 쓰다듬었다.

극이 끝난 뒤 커튼콜 때 배우 한 명 한 명을 모두 스포트라이트 조명으로 비추는 건 이 세상 모든 단역 배우들에게 보내는 박수와 격려였다.

노배우가 자신의 경험을 들려주며 햄릿 역이 좌절된 이영진을 위로하고 방을 나간 뒤 이영진이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는 독백 장면은 아쉬웠다. 이미 그의 표정과 상황으로 속마음이 관객에게 다 전해졌기 때문에 중언부언으로 느껴진 때문이다.

김성규 기자 kimsk@donga.com   

:i:29일까지 서울 종로구 대학로 SM아트홀. 3만∼5만 원. 02-762-33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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