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강이천 사건은 사기 아닌 문화투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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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월 2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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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와 불량선비
강이천 백승종 지음 408쪽·1만6500원·푸른역사

성리학이 기반인 지배 질서를 지키기 위해 애썼던 정조. 그는 당시 천주교와 정감록 사상에 심취한 일부 선비들과 치열한 문화투쟁을 벌였다. 작은 그림은 주문모 신부가 신자들에게 세례를 주는 모습을 그린 화가 탁희성 씨의 작품이다. 그림 제공 푸른역사
성리학이 기반인 지배 질서를 지키기 위해 애썼던 정조. 그는 당시 천주교와 정감록 사상에 심취한 일부 선비들과 치열한 문화투쟁을 벌였다. 작은 그림은 주문모 신부가 신자들에게 세례를 주는 모습을 그린 화가 탁희성 씨의 작품이다. 그림 제공 푸른역사


1797년 조선 조정에는 한 사기사건에 대한 보고가 올라왔다. 천안에 사는 진사 강이천이 행랑(바다)의 도적들에 관한 소문을 이용해 시골사람을 꾀어 재물을 내놓게 한다는 내용이었다. 사건에 연루된 강이천, 김건순 등은 세도가의 이름난 선비들이었다. 아쉬울 것 없는 이들이 왜 파렴치한 사기사건으로 물의를 일으킨 것일까.

수사를 담당한 형조는 사기사건을 신속하게 처리했다. 관련자들에 대한 심문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강이천과 제자이자 공범 김이백은 유배됐고 나머지는 훈방됐다. 사건의 진실은 베일에 싸였다.

신간 ‘정조와 불량선비 강이천’(푸른역사)의 저자 백승종 씨는 ‘강이천 사건’을 통해 미시사적 관점으로 18세기 조선사회를 조망한다. 서강대 사학과 교수를 지낸 그는 조선왕조실록 등 각종 사료를 바탕으로 이 사건의 실체에 다가섰다.

강이천을 부각시킨 이유에 대해 백 씨는 “당시 국왕 정조는 강이천뿐만 아니라 그와 유사한 불특정 다수의 조선 선비들을 상대로 문화투쟁을 전개했다. 조선의 심장부에서 벌어졌던 문화적 혼란을 현장감 있게 관할하기 위해 강이천이라는 정보원을 선택한 셈”이라고 말했다. 그가 말하는 문화투쟁이란 한 사회의 문화적인 주도권에 대한 다툼을 뜻한다.

강이천은 시서화로 이름을 떨친 문인 강세황의 손자. 12세에 부름을 받고 시를 지어 정조의 칭찬을 받을 정도로 어려서부터 문명을 떨쳤다. ‘일성록’ ‘내각일력’ 등의 사료에 따르면 그는 성균관에서도 전도양양한 선비였다. 표문, 책문, 고시 등 각종 과거시험에서 출중한 기량을 과시했다. 국왕과도 면식이 두터워 그의 출세를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그는 성리학을 버렸다. 여기에는 자유분방한 가풍이 작용했다. 그는 풍속화와 인물화로 이름을 떨친 조부 강세황의 영향으로 희귀한 그림과 중국 명말청초의 패사소품(稗史小品)을 즐겨 읽었다. 소품문의 가장 큰 특징은 주관성이다. 감성적인 글쓰기, 자기 고백적인 감정이 담긴 글이 소품의 주종을 이룬다. 사회적 소외와 개인의 비밀 등과 같은 소재를 다뤘는데, 이는 대의명분을 중시한 당시 성리학과 맞지 않았다.

“강이천은 조선 사회가 금기시한 모종의 사회적 상상력에 눈뜨고 있었습니다. 당시의 천주교와 패관소품이라는 새로운 문체, 정감록, 그리고 해안에 나타나고 있던 서양 선박이 금지된 상상력을 불러일으켰죠. 그의 사상을 형성한 두 축은 천주교와 ‘정감록’이었습니다.”

천주교는 1780년대 점차 교세가 커졌다. 1791년 신해박해로 양반층이 천주교에서 많이 이탈했지만 일반 백성과 여성들 사이에서는 인기가 날로 높아졌다. 정감록은 1739년 함경도에서 처음 퍼진 것으로 알려졌다. 그 핵심 메시지는 조선 왕조가 곧 멸망한다는 것이다. 강이천은 선교를 위해 조선에 밀파된 중국인 주문모 신부를 정감록에 나오는 ‘진인’, 즉 구세주로 믿었다. 천주교와 정감록 문화가 주류 이데올로기인 성리학에 바탕을 둔 기성의 정치, 경제, 사회 체제를 부정하는 당시의 상황이었다.

강이천 사건은 단순한 사기가 아니라 당시의 문화, 역사적 양상을 함축한 사건이었다. 사람들을 모아 지배세력에 맞서는 역모를 꾸몄던 것이다.

정조가 사건을 축소한 것은 이처럼 주류에 대항해 점점 커지고 있던 소문화가 알려지는 것을 꺼렸기 때문이라고 백 씨는 말한다. “강이천의 반항에는 사회적 시대적 무게가 작용하고 있었죠. 정조는 강이천의 도전을 겉으로는 하찮게 여기는 듯했지만 내면적으로는 치열하게 맞섰어요.”

정조는 강이천 사건을 두고두고 마음에 담았다. 1799년 5월 심한 가뭄이 들자 이 사건을 언급하며 “이번 가뭄의 기운도 또한 이번의 돌림병과 마찬가지로 모두 사악한 기운이 모여 그리 된 것인데, 이번의 혹심한 가뭄도 서풍이 그치지 않고 불어오는 데 기인한다”고 했다. 여기서 서풍이란 서학(천주교)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정조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의 가장 강력한 대항 무기는 문체반정이었다. 정조는 지식계층을 상대로 사상 검열과 세뇌 작업에 착수했다. 가장 효과적인 장치는 과거시험이었다. 과거시험은 권력에 다가서는 유일한 통로였기 때문에 이를 통해 선비들을 길들인 것이다.

그 덕분인지 19세기 조선 사상계는 정조가 원했던 대로 주자 성리학의 틀을 유지했으며 양반들 가운데 사회적 상상력을 꿈꾸는 사람은 거의 사라졌다고 백 씨는 설명했다. “이런 점에서 정조를 가리켜 ‘르네상스의 군주’라고 하는 주장에 결코 동의할 수 없습니다. 르네상스란 재생이고 인문정신의 해방인데 정조의 르네상스는 속박이었죠.”

그는 근대 역사학의 지나친 일반화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미시사적 연구 방법을 사용했다고 말했다. “요즘 역사학은 과학을 표방하고 있습니다. 일반화만 강조하면 역사적 사실을 단순화할 수 있어요. 정조를 훌륭한 인물이라고만 하면 그 시대의 다양한 모습을 놓치게 됩니다.” 그는 앞으로 이순신과 조선의 여성들을 미시사적 관점에서 조망하는 책을 낼 계획이다. 애국자이자 영웅이며 속박받은 존재라는 전형적인 평가를 벗어나 그들의 인간적 모습을 그리겠다는 의욕이다.

저자는 현재 충남의 한 시골마을에서 학생들에게 한문고전을 가르치며 마을사람들의 구술 생애사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민병선 기자 bluedo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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