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뮤직]신여성 소프라노, 조선 음악산업의 서막을 열다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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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8월 26일 15시 4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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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사의 찬미\'란 노래와 극적인 자살사건으로 조선을 떠들썩하게 만든 윤심덕.
1920년대 \'사의 찬미\'란 노래와 극적인 자살사건으로 조선을 떠들썩하게 만든 윤심덕.
"삶에 열중한 가련한 인생아 너희는 칼 위에 춤추는 자로다…"

● 대중문화에서 유일하게 복제 할 수 없는 게 '죽음의 미학'
● 일본 제국주의의 그늘 속에 성장해야 했던 조선의 대중음악

1926년이 한국 대중예술, 혹은 문화산업의 원년임은 명백하다. 전통예술의 극점이랄 수 있는 '춘향전'이 창극으로 명창 이동백과 김추월 등에 의해 무려 18장짜리 전집으로 발표되어 시장의 주목을 끌기도 했다.

이 '춘향전'의 반대편에 루마니아의 작곡가 이바노비치의 관현악 월츠 '다뉴브 강의 잔물결'의 선율에 곡을 붙인 윤심덕의 '사의 찬미'가 우두커니 서 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엔 한국 영화의 붐을 몰고 온 춘사 나운규의 '아리랑'이 망국의 대중들의 가슴에 민족주의의 불길을 놓고 있었다.

전통과 외래의 지평이 어지러이 중첩되던, 어딘가에 '들린' 듯한 정염이 회오리처럼 몰아치던 그 해에 영화와 대중음악, 그리고 공연으로 대표되는 근대적 대중문화의 틀이 자리 잡힌 것이다.

이것으로 '사의 찬미' 신드롬에 대한 서술은 끝났는가?

아니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이 죽음의 신드롬은 우리 대중음악의 본격적인 개막이 음악 그 자체의 구심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죽음이라는 음악 바깥에 일어난 스캔들의 원심력에 의해 이루어졌음을 일러 준다. 그리고 동시에 어느 누구도 눈치 채지 못한 사이에 평균율 12음계로 이루어진 서양음악이 이 신드롬을 통해 슬그머니 상륙해 버린 것도 적시되어야 한다.
김혜수 박해일 주연의 영화 ‘모던보이’. 1930년대 경성의 분위기를 잘 표출한 영화다.
김혜수 박해일 주연의 영화 ‘모던보이’. 1930년대 경성의 분위기를 잘 표출한 영화다.

■ 이제 다시 본격적으로 논의해야 할 '사의 찬미'

아마도 윤심덕은 죽는 그 순간에도 자신이 불우한 조국의 대중음악사를 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그는 경성 사범학교와 동경의 우에노 음악학원(홍난파와 동창)에서 유학한 엘리트답게 일본풍 유행창가나 이 땅의 하층계급들이 부르는 민요를 단호하게 거절하고 '예술가곡'을 부르는 '성악가'로 자임하고 나섰다.

'사의 찬미' 역시 서양 '클래식' 작곡가의 작품에서 선율을 빌어다 동생인 윤성덕이 피아노로 반주하며 부른 것이다. 그러다 보니 그 자신은 그것을 대중음악이라고 생각할 리는 만무했을 것이다.

서양 문화에 대한 무조건적인 동경은 당시 기층 대중이 선망의 시선으로 바라보던 식민지 인텔리겐차 계층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여기에다 윤심덕은 '자유연애론자'라는 격렬한 주홍글씨를 하나 더 탑재한다. 당시의 사람들이 윤심덕을 주목했던 것도 보기 드문 유학파 신여성이라는 측면을 넘어 봉건적 가부장주의를 정면에서 부인하는 위험천만한(!) 이데올로기 때문이었다.

죽음을 맞이하던 1926년 우리 나이로 서른한 살이 된 윤심덕은 실제로 결혼하지 않았다. 그리고 김우진을 위시하여 당대 서울 갑부 이용문 등과 염문을 거침없이 뿌렸다.

이 '자유연애론자'라는 또 하나의 표식이 그의 죽음을 더욱 쇼킹한 것으로 몰고 가는 데 기여한다. 다시 말해 이들의 죽음은 봉건적 결혼 제도의 벽 앞에서 좌절한 식민지 젊은 엘리트의 불행한 자화상인 것이다.

윤심덕이 작사하였다고 알려진 '사의 찬미'의 세 절은 직설적인 노래 제목처럼 '이 풍진 세월'의 1절이 근처에도 오지 못할 만큼 지독한 염세로 가득 차있다. 특히 '웃는 저 꽃과 우는 저 새들이/그 운명이 모두 다 같고나/삶에 열중한 가련한 인생아/너희는 칼 위에 춤추는 자로다'라고 일갈하는 두 번째 절의 노랫말은 절창이다.

그런데…그런데 말이다, 저 노랫말의 지독한 염세와 체념 끝에 윤심덕과 김우진은 정말 자살했을까? 이 무슨 어리석은 반문이냐고? 하지만 이들이 동반 자살했다는 명확한 증거는 없다. 관부연락선 객실에서 발견된 김우진의 짤막한 유서가 있긴 하지만 그 또한 얼마든지 조작될 수 있는 것이다.

이들의 자살은 구체적 증거 없이 그냥 기정사실화되었다. 어쩌면 당시 식민지 사회를 관통하던 퇴폐적 낭만주의가 분위기를 조장하였을는지도 모르겠다.


■ "윤심덕과 김우진은 정말 자살했을까?"

그러나 이들, 특히 우리의 여주인공이 자살한 정황만큼이나 자살이 아닌 정황, 곧 타살의 정황도 높다는 사실이 우리를 미궁으로 몰고 간다. '사의 찬미'를 낭만주의로 해석하지 말고 사실주의로 접근해 보자.

먼저 윤심덕과 김우진의 출신 성분. 목포 지주의 후예인 김우진과는 달리 평양 출신의 윤심덕은 넉넉하지 못한 집안에서 태어나 자랐다. 그의 사회적 성취는 투철한 그의 성취동기에 따른 것으로, 일본 유학 역시 총독부 관비 유학생 자격으로 다녀온 것이다.

그는 억척같이 그의 남동생 윤기선과 여동생 윤성덕을 모두 유학 보냈는데, 윤성덕은 '사의 찬미' 취입 개런티로 유학 비용을 마련했지만 남동생을 유학 보낼 때는 갑부 이용문의 도움을 받은 것으로 소문이 파다하게 났다.

그는 자신의 예술, 곧 서양음악을 수용해 주지 못했던 식민지 사회에 절망하긴 했지만 녹음을 앞두고 성악의 본고장인 이탈리아에 유학가고 싶다는 희망도 피력한 것으로 보아 자살을 감행할 만큼 절망적인 상황은 아닌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윤심덕의 억척같은 생명력에 기초한 퍼스낼러티가 첫 번째 반증이라면 두 번째 석연찮은 점은 바로 그와 계약한 이토오 레코드 회사다. 음반 시장도 성숙되지 않았고 대중적인 음악 장르도 노래하지 않겠다는 이 늙은(?) 성악가에게 이토오 레코드사는 5백원의 거금을 계약금으로 흔쾌히 지불했다. '부활의 기쁨'같은 찬송가, '매기의 추억' 같은 낯선 서양의 노래가 식민지의 음반 시장을 열어젖힐 것이라고 믿었단 말인가?

'사의찬미'도 미궁이다. 본래 녹음 계약에는 이 노래가 없었다. 경성에서 맺은 본래 계약서엔 없던 노래가 이들이 불귀의 객이 되고 난 뒤엔 가장 먼저 음반으로 나와 시장을 강타했다. 우연이라고 치부하기엔 뭔가 이상한, 서늘한 느낌이 엄습하지 않는가?


■ 윤심덕의 자살로 가장 큰 이득을 본 곳은 '일본축음기회사'

스릴러 영화의 법칙대로라면 모든 미궁의 죽음은 그 죽음을 통해 가장 이익을 본 자를 의심하면서 스토리는 전개된다. 이들의 죽음으로 가장 큰 이익을 본 자는 누구인가? 이토오 레코드 회사? 아니다. 이 죽음으로 가장 큰 이익을 본 이는 하드웨어 회사인 일본축음기회사(줄여서 '일축'이라고 했다)이다. 윤심덕 신드롬으로 열린 유성기 시장은 1930년대 중반에 이르면 물경 35만대의 유성기가 한반도에 보급되는 것이다.

최종적으로 음반을 만든 이토오 레코드 회사가 바로 이 일축의 자회사라는 사실이 우리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이 두 회사는 한 남녀의 죽음만으로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 두 시장을 개척한 셈이다.

관동대지진이 일어나 죄 없는 조선인들을 백주에 학살한 것이 고작 3년 전인 1923년이다. 이 죽음이 만약 (정말 만약이다) 공황을 앞둔 일본 자본주의의 출구를 식민지를 통해 열기 위해 씌어진 시나리오에 의한 타살이라면 한국의 대중음악사는 세계에서 가장 불행한 역사의 자궁 속에서 탄생한 것이 될 수도 있다.

이들이 자살했는지 혹은 타살 당했는지 죽은 자는 말이 없고 현해탄도 침묵 중이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식민지 여성 엘리트의 에로틱한 희생제를 통해서 한국의 대중음악사가 본격적으로 발진하였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또한 그 뒤로도 여성 음악인들에게 부과될 불행의 오멘과도 같은 것이었다.

'사의 찬미'는 미궁의 비극이다. 강제 병합 100년이 되는 8월에 다시 생각한다. 윤심덕과 '사의 찬미'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그의 의지와 좌절, 그가 도달하고자 했던 이상과 그것의 한계는 무엇인가? 무엇이 그를 죽음으로 몰았는가?


강헌 / 음악평론가

※ 오·감·만·족 O₂는 동아일보가 만드는 대중문화 전문 웹진입니다. 동아닷컴에서 만나는 오·감·만·족 O₂!(news.donga.com/O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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