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칼럼/박현모]드라마보다 더 극적인 숙종시대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5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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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동이’ 때문인지 조선 후기 군주 숙종에 대한 관심이 높다. 숙종이 미행(微行)을 자주 했느냐, 정말로 다정다감한 임금이었느냐는 질문을 받곤 한다. 왕의 궁궐 밖 거둥을 풍부하게 담은 ‘한국구비문학대계’에 숙종의 이야기가 78건이나 실려 있다는 사실을 통해서 볼 때 그는 야행성 군주였던 것 같다.

다정다감한 임금이었는가에 대한 대답은 회의적이다. 작년에 대학원생들과 ‘숙종실록’ 강독을 마친 후 함께 내린 결론은 숙종이 마키아벨리스트였다는 것이다. 정치세력 간의 변화와 균형을 주도하고 언론플레이에 능한 현실 정치가라는 평가가 그것이다. 실제로 숙종은 부왕인 현종이나 이전의 국왕 인조나 효종도 어찌하지 못했던 대정치가 송시열을 거꾸러뜨린 유일한 군주였다.

숙종이 왕위에 올라 송시열과 15년간이나 정치적 수 싸움을 전개하는 모습을 보면 얼마나 노련한 정치가인가를 알 수 있다. 83세의 노회한 정치가 송시열이 스물아홉 살의 군주 숙종에게 무너진 계기는 1689년의 ‘세자책봉 반대상소’였다. 송시열은 이 상소에서 태어난 지 1년밖에 안 된 장희빈의 아들(나중의 경종)을 세자로 책봉하는 것은 너무 이르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숙종은 한밤중에 승지 등 여러 신하를 들어오게 했다. 그는 “일이 정해지기 전에 말하는 것은 괜찮지만 이미 정해진 일을 가지고 말하는 것은 반드시 그 뜻하는 바가 있기 때문”이라면서 노기 띤 목소리로 신하 모두에게 소견을 말하게 했다. 이 자리에서 신하들은 대부분 송시열의 상소가 ‘망발’이며 참으로 ‘부당한 말’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국가의 대계를 훼방 놓는 ‘반역의 신하’라고 극언하는 신하도 있었다.

대정치가 송시열을 꺾은 유일한 왕

숙종은 신하들의 의견을 받아들이는 형식으로 송시열의 관직을 빼앗고 도성 밖으로 내쫓았다. 송시열의 제자인 영의정 김수흥도 파직했다. 김수흥이 전에 “예로부터 임금의 무리들은…”이라고 왕을 경멸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는 이유였다. 여기서 보듯이 숙종은 정적을 제거할 때 반대자가 스스로 함정에 빠지기를 기다린 다음 일망타진하는 방법을 사용하곤 했다.

1688년부터 1689년 사이의 ‘숙종실록’은 그런 숙종의 통치 방식을 잘 보여준다. 한밤중에 대궐 담을 넘다 체포된 군사를 관대하게 풀어주는 기사로부터, 후궁 장옥정의 출산을 전후해 그의 어미가 화려한 가마를 타고 궁궐에 출입한 것을 청죄하는 일 등 다양한 기사가 실려 있다. 특히 장옥정의 왕자 생산 이후 인현왕후의 폐비 및 새 왕비 책봉 등 숱한 소설과 사극의 소재가 되었던 사건이 담긴 것도 이 시기의 실록이다.

이번에 흥미롭게 읽은 내용은 인현왕후 폐비를 반대하는 노론 신하들을 숙종이 국문하는 대목이다. 1689년 4월 25일에 86명의 전현직 관리가 폐비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자 숙종은 한밤중에 신하를 한 명씩 국문하면서 “한 명의 부인을 위해 절의를 세우느니 차라리 나를 폐위하는 게 낫지 않겠느냐”며 밤새 고문했다. 항변하는 박태보를 향해 “네가 더욱 독기를 부리는구나, 독기를 부려. 매우 쳐라, 매우”라면서 더없이 진노하는 모습을 보였다. 놀라운 점은 국문 과정을 생중계하듯 모든 언행을 기록하는 사관의 태도이다. 사관은 이를 통해 ‘폭군’ 숙종의 모습을 여지없이 폭로한다.

그럼에도 숙종 시대는 풍요로운 시대였다. 상평통보라는 동전의 유통과 대규모 농업경영에 의한 생산력의 증대로 ‘한 해 동안에 호화주택을 두 채씩이나 마련하는’ 부자가 등장했다. 집짓기와 집수리를 되도록 웅장하고 화려하게 하는 풍조가 유행하는가 하면, 한 번의 잔치를 열흘이 넘게 계속하는 사람도 많았다. 하지만 이 시기는 검계(劍契)가 출몰하고 장길산(張吉山)이 활약하는 데서 보듯이 사회적 갈등이 심각하게 노정된 때였다.

‘열흘 잔치’ 풍요와 도적떼의 공존

재위 23년째인 1697년 1월에 숙종은 “극적(劇賊) 장길산이 날래고 사납기가 견줄 데가 없다. 여러 도(道)로 왕래하여 그 무리들이 번성한데, 벌써 10년이 지났으나 아직 잡지 못하고 있다”면서 “상세하게 정탐하고, 별도로 군사를 징발해서 체포하라”고 긴급 지시한다. 조정의 체포 독려와 높은 현상금에도 불구하고 장길산을 끝내 추포하지 못했다. 숙종 정부의 무능력을 그대로 드러낸 사건이었다.

숙종 정부에서 가장 아쉬운 점은 새로운 비전의 결여이다. 숙종은 정통성 시비에 휘말릴 염려가 없는 적장자로 왕위에 오른 탓인지 재위 기간 46년 내내 이렇다 할 국가경영의 방략을 제시하지 않았다. 세종과 정조가 즉위교서에서 각각 ‘백성들이 잘살게 되는 나라’와 ‘대통합의 정치’를 제시한 것과 대조를 이룬다. 숙종이 풍요로움을 뛰어넘어 인재의 마음을 설레게 할 국가비전을 제시했다면, 그래서 우리 역사가 한 번 더 도약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박현모 한국학중앙연구원 세종국가경영연구소 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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