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걸리, 세계인의 술로/1부]<4>막걸리 맛 결정짓는 테루아가 있다

  • Array
  • 입력 2010년 2월 19일 03시 00분


코멘트

달콤 새콤 쌉쌀 걸쭉 담백… 사연많은 우리 인생같은 그 맛
쌀맛 따라 술맛 천차만별… 토양-일조량도 주요변수
지역 특색따른 명품술 특화… 궁합맞는 안주 개발 숙제로


우리 술 막걸리는 억울하다. 오랜 세월 ‘그게 그거’라는 평가를 받아왔다. 와인이나 맥주, 사케가 수천만 가지의 오묘한 맛을 낸다며 애주가들에게 어필하던 것과 사뭇 달랐다.

하지만 막걸리도 어떤 쌀을 재료로 쓰느냐에 따라 맛이 달라진다. 그뿐 아니다. 재배 지역의 기후, 누룩, 제조법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막걸리에도 와인처럼 ‘테루아’가 있다.

○ 쌀만 달라도 술맛이 다르다


전통주 제조업체 ‘배상면주가’는 지난달 전국 8개 도에서 생산한 쌀을 이용해 ‘내 고향 막걸리’ 8종을 내놓았다. 핵심 재료인 쌀의 생산 지역과 종류만 다르게 해서 같은 제조방법으로 막걸리를 빚었다. 그 결과 알코올 도수는 7도로 같았지만 맛은 크게 달랐다.

술 연구원과 마케터, 전통주 동호회 회원 등 이른바 술 전문가 10명을 모아 단맛, 쓴맛, 신맛, 걸쭉함, 향의 강도 등 다섯 가지 요소를 수치화해 점수를 매겼더니 최대 15%까지 다른 것으로 나타났다.

경기 포천시에서 생산된 추청벼로 만든 막걸리는 단맛 점수가 평균 5.7점으로 가장 높았다. 반면 전북 고창군의 온누리벼로 만든 막걸리의 단맛은 평균 4.2점으로 가장 낮았다. 신맛은 강원 평창군 오대벼로 만든 막걸리(평균 4.6점)가 가장 강했고 충남 공주시의 남평벼로 만든 막걸리(평균 3.6점)가 가장 약했다. 충북 단양군의 삼강벼로 만든 막걸리는 가장 걸쭉하면서 향도 강한 것으로 나타났다.

막걸리에 따라 사과향이 감돌기도 하고 쌉쌀한 여운이 오래가기도 했다. 담백함이 탁월한 막걸리도 있었다. 무게감이나 균형감 등 와인을 평가할 때 쓰는 용어를 써도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어떤 막걸리가 맛있는 것일까. 배상면주가 관계자는 “소비자들에게 눈을 가리고 맛을 보게 했는데 주로 자신의 고향에서 난 쌀로 만든 막걸리가 맛있다고 해 깜짝 놀랐다”고 전했다.

○ 다양한 테루아, 다양한 막걸리

국내에는 막걸리 면허를 가진 술도가만 780곳이다. 저마다 술 빚는 온도와 누룩, 물이 다르다. 와인이 세계적인 술로 성장한 배경에는 사실 이런 ‘복잡함’을 마케팅 요소로 내세운 면이 있다. 사람들은 와인을 마시며 머릿속으로 여행을 하고 스토리를 듣는다.

한국에도 ‘테루아’를 느낄 수 있는 막걸리가 많다. 전북 정읍시의 ‘송명섭 막걸리’는 전통주 제조 무형문화재인 송명섭 명인이 직접 농사지은 쌀과 한국 누룩으로 빚는다. 약간 쓰고 텁텁하다. 감미료 등 첨가제를 넣지 않아 단맛이 거의 없다.

충북 진천군은 ‘생거진천 사거용인(生居鎭川 死居龍仁·살아서는 진천, 죽어서는 용인)’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살기 좋은 고장이다. 이곳의 ‘덕산 막걸리’는 3대가 가업을 이으며 70년 이상 진천 쌀로 빚고 있다. 술맛이 사람들을 닮아 담백하면서도 맑다.

제주에서는 척박한 자연환경 때문에 쌀이 아닌 좁쌀을 이용해 ‘오메기술’을 빚었다. 오메기라고 부르는 술떡과 누룩을 섞어 발효시켜 만드는데 새콤달콤한 맛이 나 막걸리를 싫어하는 사람들도 즐길 수 있다.

강원 횡성군의 ‘이화주’는 고려 왕실에서 마시던 왕가의 술을 국순당이 옛 문헌에 따라 복원했다. 다른 막걸리와 달리 백설기로만 발효시켜 걸쭉하고 진한 맛이 난다. 부산의 ‘산성막걸리’는 16세기에 금정산성을 쌓던 병사들을 위해 만들기 시작했다. 지하수와 전통적 방식의 누룩으로 빚어 독특한 맛을 살리고 있다.

막걸리바 친친의 장기철 대표는 “프랑스 보르도 지방에서 미국 포도로 와인을 만든다면 보르도 와인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것처럼 수입 재료로 만든 막걸리도 제대로 된 막걸리가 아니다”라며 “그 지역에서 나는 쌀과 물로, 그 땅의 기후로 만든 막걸리가 제대로 된 막걸리”라고 말했다. 소주나 맥주와 달리 막걸리는 ‘테루아’를 반영할 수 있는 술이다.

○ 막걸리와 음식의 궁합

모든 술은 어울리는 안주와 함께할 때 더욱 맛이 좋아진다. 프랑스에선 와인과 안주의 궁합을 뜻하는 말로 ‘마리아주(mariage)’라는 용어를 쓴다.

막걸리에도 마리아주가 있다. 막걸리도 곁들여 먹는 음식에 따라 맛이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한다. 한국전통주연구소 박록담 소장은 “술맛을 상하지 않게 하는 음식이 좋은 막걸리 안주”라고 강조했다. 특히 막걸리는 도수가 낮기 때문에 자극적이지 않고 수분이 적은 음식이 안주로 적당하다. 자극적인 안주는 막걸리의 맛을 제대로 느끼게 하기 어렵고 수분이 많으면 막걸리가 싱거워져 제대로 맛이 살아나지 않는다.

단맛이 강한 막걸리는 고소한 맛이 나는 빈대떡이나 양념을 덜 쓴 도토리묵이 제격이다. 짠맛이 나는 안주도 막걸리의 단맛을 더 돋보이게 해준다. 하지만 쑥갓에 고추 등 다양한 양념을 넣어 버무린 자극적인 도토리묵은 막걸리의 맛을 해칠 수 있기 때문에 피해야 한다.

막걸리의 신맛이 강할 때는 신맛이 센 안주는 어울리지 않는다. 담백한 두부나 물김치가 잘 맞는다. 담백한 맛과 신맛이 서로 어우러져 따로 먹을 때보다 훨씬 좋은 맛이 난다.

박 소장은 “안주가 지나치게 맛있거나 강하면 술이 맛없게 느껴질 수 있다”며 “막걸리의 부가가치를 세계적으로 높이기 위해서는 막걸리와 잘 어울리는 우리 음식을 찾는 작업도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특별취재팀>
▽팀장 홍석민 산업부 차장
▽산업부
김기용 기자 kky@donga.com
유덕영 기자 firedy@donga.com
한상준 기자 alwaysj@donga.com
:: 테루아(terroir) ::

토양 일조량 지질 기후 등 와인 맛에 영향을 미치는 지역적 자연조건을 뜻하는 프랑스어. 테루아를 잘 드러내는 와인이 좋은 와인으로 꼽힌다.

:: 마리아주(mariage) ::

프랑스어로 ‘결혼’. 와인과 요리의 궁합을 표현할 때 쓰는 말이다.

■ 편의점도 막걸리 향 ‘그윽’… 와인-사케 눌러
전용코너 등장… 매출 2배 껑충


18일 서울 금천구 GS25 시흥점에 마련된 주류 코너. 최근의 막걸리 열풍을 반영하듯 막걸리가 가장 눈에 잘 띄고 고르기 편한 자리에 진열돼 있다. 김재명 기자
18일 서울 금천구 GS25 시흥점에 마련된 주류 코너. 최근의 막걸리 열풍을 반영하듯 막걸리가 가장 눈에 잘 띄고 고르기 편한 자리에 진열돼 있다. 김재명 기자

편의점 업계가 주류 전문형 매장을 속속 선보이면서 막걸리와 와인, 사케의 대결 구도가 본격화되고 있다. 특히 막걸리는 백화점과 대형마트에 이어 편의점에도 전용 코너가 생기는 등 저변이 확대되고 있다.

18일 편의점 업계에 따르면 GS25는 올해부터 서울 금천구 시흥동에 ‘주류 전문형 편의점’을 마련해 시범 운영을 시작했다. 일반 편의점보다 2배 이상 많은 200여 가지 주류를 판매하는 이 매장은 막걸리와 사케 등의 전용 판매대를 운영하고 있다. GS25 관계자는 “수입 맥주와 사케 등 다양한 주류를 찾는 고객이 늘어 전문 매장을 열게 됐는데, 전통주의 인기로 막걸리와 사케의 대결 구도가 형성되고 있다”고 전했다.

매출 실적은 막걸리가 압도적으로 높다. GS25가 막걸리와 사케를 동시에 판매한 1월 1일부터 2월 16일까지 매출액을 집계한 결과 막걸리 매출이 사케보다 6배 이상 높게 나타났다. 막걸리는 값도 저렴하고 도수가 6, 7도로 낮아 인기라는 것. 하지만 제품 종류는 사케가 16종인 데 비해 막걸리는 8종에 불과하다. 이미 세계적으로 대중화된 사케는 제품이 다양하게 상품화됐지만, 막걸리는 국내 제조회사가 전국 유통망을 갖추지 못해 취급할 수 있는 상품이 적다는 게 회사 측 설명이다.

막걸리는 와인과의 대결에서도 압승을 거두고 있다. 훼미리마트가 1월 1일부터 2월 17일까지 와인과 막걸리의 매출을 비교해 본 결과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막걸리는 187.1%의 높은 신장세를 보였다. 와인은 5.4% 신장하는 데 그쳤다. 2007년부터 ‘와인 특화점’을 운영하고 있는 이 편의점은 이에 따라 지난해 12월부터 ‘막걸리 특화점’도 늘리고 있다. 막걸리 특화점에서는 취급 막걸리를 기존 4종에서 12종으로 늘리고 전용 냉장고를 개발해 막걸리를 진열한다. 훼미리마트 관계자는 “시범 운영한 막걸리 특화점의 실적이 좋아 전국 100여 개 매장으로 확대했다”고 말했다.

일반 편의점에서도 막걸리의 인기는 두드러진다. 세븐일레븐이 주류 매출 신장률을 비교한 결과 1월 1일부터 이달 17일까지 막걸리 매출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98%나 늘었다. 소주와 맥주의 신장률은 각각 7.0%, 3.1%에 불과했다. 또 양주와 와인은 ―0.3%, ―14.0%로 마이너스 신장세를 보였다.

강혜승 기자 fineday@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