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분도 설움도 삭인 ‘고려인 아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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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1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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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할린을 좋다고 내가 왔나/일본놈들 무숩어 내 여기 왔지…’
정선아리랑연구소, 연구서 발간

1910년대 고려인들이 처음 정착했던 러시아 연해주 개척리 마을의 풍경. 이들은 아리랑을 부르며 망향의 한을 달랬다. 사진 제공 정선아리랑연구소
1910년대 고려인들이 처음 정착했던 러시아 연해주 개척리 마을의 풍경. 이들은 아리랑을 부르며 망향의 한을 달랬다. 사진 제공 정선아리랑연구소
19세기 말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 러시아로 건너간 뒤 강제이주와 부당한 차별을 겪었던 연해주와 사할린 일대의 고려인들. 아리랑은 이들에게 자신들의 역사를 기억하는 통로이자 구심점이었다.

러시아 고려인 아리랑의 역사와 내용, 현황 등을 한눈에 알 수 있는 연구서가 5일 출간됐다. 정선아리랑문화재단은 러시아 고려인의 아리랑에 관한 인터뷰, 음원, 잡지와 신문 등을 모아 정리한 ‘러시아 고려인 아리랑 연구’를 낸다고 이날 밝혔다.

진용선 정선아리랑연구소장은 1990년대 초부터 2009년까지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 우수리스크, 사할린 주 일대를 돌아다니며 직접 고려인 1세대와 2세대를 만나 녹취록을 남겼다. 현재 연해주 지역의 고려인을 대상으로 아리랑의 의미에 관한 설문조사를 실시하기도 했다.

이를 통해 국내에서도 찾기 힘들었던 옛 아리랑 곡조와 가사를 발굴해냈다. 예를 들어 정선아리랑은 연동아리랑이라는 이름으로, 강원도 아리랑의 곡조는 ‘친구’ ‘화토노래’ 같은 가요로 바뀌어 남아 있었다. 주로 북한과 중국지역에서 전승됐던 ‘아라린가 쓰라린가 영천인가’라는 가사가 특징인 ‘영천아리랑’도 전승되고 있었다. 밀양아리랑, 진도아리랑 등 출신 지역의 아리랑을 그대로 기억하는 경우도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체험을 우려낸 아리랑 가사가 등장하기도 했다. ‘아리랑 고개는 열두나 고개/넘어갈적 넘어올적 울음운다’ ‘사할린을 좋다고 내가 왔나/일본놈들 무숩어 내 여기 왔지//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아리랑 고개로 넘어 간다’ 등의 가사 속에는 타국에서 가난과 차별을 겪어야 했던 이들의 설움이 배어 있다.

당시 각 지역에서 자발적으로 결성된 ‘소인예술단(10∼40명 규모의 예술인 집단)’이 아리랑 전승에 어떤 역할을 했는지도 조사했다. 천도교관현악단, 피오네르소인예술단, 레완트연초공장소인연극단, 조선노동청년극장 등은 1920, 30년대 연해주에서 활동했던 대표적인 소인예술단이다. 진 소장은 “이들은 유랑극단처럼 게릴라식 공연을 하며 ‘아리랑’은 물론 ‘도라지’ ‘봉선화’ 같은 조선의 전통 가락을 레퍼토리로 삼았다”고 말했다. 이후 1950, 60년대 사할린 고려악단, 1980년대 연해주 우수리스크 아리랑 가무단의 활동, 1990년 창극 ‘아리랑’ 공연도 러시아 아리랑의 명맥을 잇는 데 역할을 했다.

2003, 2005, 2009년에 걸쳐 연해주 지역 고려인 3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현지 설문조사에서는 56.4%가 아리랑을 ‘기쁜 노래’로, 59%가 아리랑은 고려인을 대표하는 노래로 인식하고 있었다. 아리랑을 처음 접촉한 경로는 주로 부모(48.4%)와 동네어른(29.7%)이었지만 30세 이하 젊은층 중 29%가 아리랑을 부를 줄 몰랐다. 진 소장은 “조사 결과에서도 알 수 있듯 아리랑을 기억하고 있는 고려인 1, 2세대가 사망하기 전 이들의 개인적 경험을 체계적으로 기록하는 작업이 더 많이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이새샘 기자 iamsa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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