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평생을 바친 유물사랑… 한국 박물관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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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9년 11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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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물관에 살다/진홍섭 외 10명 지음/388쪽·1만5000원·한국박물관 개관/100주년 기념사업회, 동아일보사

순종은 1909년 11월 창경궁에 제실박물관을 열며 ‘여민해락(與民偕樂·백성들과 함께 즐거움을 나누다)’이라는 말을 내세웠다. 왕족이나 귀족들만 향유하던 문화를 일반 시민들도 누릴 수 있도록 한다는 뜻이다.

그로부터 100년, 한국 박물관 역사의 산증인 11명을 인터뷰했다. 1990년 작고한 고 김재원 국립박물관 초대 관장의 인터뷰는 딸이자 미술사학자인 김리나 홍익대 명예교수가 대신했다. 올해 3∼5월 동아일보에 연재한 ‘한국 박물관 100년의 사람들’ 시리즈에 내용을 보충해 책으로 엮었다.

6·25전쟁 당시, 북한 인민군은 서울 점령 뒤 당시 경복궁에 있던 국립박물관의 유물을 북한으로 가져가려 했다. 그러나 박물관 직원들이 낮에는 유물을 포장했다 밤에는 도로 풀어놓는 일을 반복하며 시간을 지연시킨 덕에 북한 이송을 막을 수 있었다. 1·4후퇴 때는 유진 크네즈 부산 미국공보원장이 김재원 관장에게 미리 귀띔을 해줘 아슬아슬하게 유물을 부산으로 옮길 수 있었다.

1963년 정양모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이 전남 강진에 갔을 때의 일이다. 당시에는 마을 주민이 청자 파편을 외국 학자나 여행객에게 파는 일이 잦았다. 정 전 관장과 일행은 당시 마을 사람들이 팔려고 가져온 파편 중 청자기와를 발견한다. 청자로 지붕을 덮은 건축물은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데다 청자기와는 당시까지 국내에서 서너 점밖에 출토된 적이 없을 정도로 귀한 것이었다. 그 뒤 20여 년간 강진 발굴조사가 진행돼 막새 완형을 비롯한 기와 수백 점을 발굴했다. 이때 발굴된 청자기와는 올해 한국 박물관 개관 100주년 상징물 ‘청자정(亭)’ 건립의 모델이 됐다.

부족했던 문화재 보존 인식과 장비, 인력 문제로 후회를 남긴 일도 있었다. 1971년 당시 백제 무령왕릉 발굴은 사흘 만에 ‘해치운’ 발굴이었다. 막판에는 바닥에 흩어진 유물을 삽으로 긁어내 자루에 쓸어 담다시피 했다. 당시 발굴에 참여했던 지건길 문화재위원회 부위원장(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은 이 일을 “차마 고고학 발굴이라고 내세울 수 없는 우를 범했다”고 회상한다. 그러나 이 경험을 바탕으로 1973년 경주 천마총 발굴은 철저한 계획 아래 신중히 진행할 수 있었다.

6·25전쟁이 일어나자 신문지로 유물을 둘둘 말아 급히 피란을 가야 했고(진홍섭 국립박물관 개성분관 초대 관장) 민속박물관 개관 때는 마을 장승을 몰래 가져와 전시하기도 했다(장주근 전 경기대 교수). 이처럼 평생 박물관과 생사고락을 함께해 오면서도 “다시 태어나도 박물관 사람이 되고 싶다”(이난영 전 국립경주박물관장)고 말하는 데서 한국 문화와 박물관에 대한 이들의 무한한 애정을 느낄 수 있다.

이새샘 기자 iamsa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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