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지금 있는 곳이 꿈이 아니라고 믿나요”

  • 입력 2009년 9월 26일 02시 56분


코멘트
◇북쪽 거실/배수아 지음/288쪽·1만 원·문학과지성사

배수아 4년 만에 새 소설… 낯선 문장-기이한 주제 눈길
“우리가 사는 삶도 결국엔 그림자나 신기루 같은 것일 뿐”

소설가 배수아 씨(44)의 신작 장편소설 ‘북쪽 거실’(문학과지성사)은 형이상학적이고 몽환적인 화풍으로 알려진 이탈리아 초현실주의 화가 조르조 데 키리코의 작품 ‘거리의 우울과 신비’(1914년)를 표지 이미지로 썼다. 열주로 이어진 건물 샛길로 한 소녀가 굴렁쇠를 굴리며 접어든다. 단조로운 구도와 과장된 원근법, 불안함을 고조시키는 노란색 길 끝에는 지팡이를 든 정체불명의 그림자가 비친다. 배 작가는 작품을 쓰는 동안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초조함을, 꿈같은 비현실성을 환기시키는 이 기묘한 작품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작가가 표지 이미지로 직접 고른 그림은 첫 장을 넘기기 전부터 소설의 요체를 함축해 일러주는 듯하다. 전작 ‘당나귀’ 이후 4년 만에 발표한 이 소설은 키리코의 그림만큼이나 모호하며 초현실적이다. 독일 베를린에 체류 중인 작가를 e메일로 인터뷰했다.

“베를린 인근의 마을에서 지내다 왔다”며 회신이 늦은 것에 미안해한 작가는 “이 작품의 모티브라고 할 만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꿈만으로 한 권의 책을 써보고 싶다는, 몇 년 전부터 가져온 소망이다”라고 말했다. 그 말처럼 작품은 행갈이에 인색하며 뚜렷한 서사가 없고, 별다른 설명도 없이 시점이나 서술 주체가 변하기도 한다. 일관된 논리도, 서사도, 주체도 없어 실제로 누군가의 꿈같이 느껴진다. 해설을 쓴 김형중 씨는 이처럼 낯선 작품에 대해 “사력을 다해 읽거나, 혹은 가급적 이른 시기에 읽기를 포기해야 할 책”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작가는 그런 평가가 의외라고 답변했다.

“이 책의 문장들이 독자들에게 그렇게 심각한 수고를 요하는 정도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특별한 실험을 시도하지도 않았다. 단지 강물이 흐르듯이, 끊어지지 않게 하고 싶었던 것뿐이다. ‘종래의 방식을 벗어나서 흐른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실험적이라고 불릴 만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는 “그렇지만 그런 평가가 내려지는 것을 보면 한국의 문학 독자들이 내가 생각해온 것보다 보수적인 것 같다”라고 덧붙였다.

소설에는 별 이유를 알 수 없이 수용소에(설립 목적과 정체가 작품 속에서 명시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자발적으로 입소했던 오디오북 성우 수니, 전직 신문기자이자 수니의 옛 애인인 희태, 희태의 또 다른 애인이자 극작가 지망생인 린 등이 등장한다. 뚜렷하게 전개되는 이야기는 없고 대신 수없이 많은 회상과 상념, 편지, 낭독 대본, 꿈이 삽입된다. 그러나 그것들의 주체가 누군지도 불분명하다. 수니가 걷는 수용소 안의 긴 회랑이나 여행지의 풍경 등은 키리코의 그림 혹은 꿈속의 한 장면을 연상시킨다. 발화 주체가 모호한 이들은 “우리에게 그 행위는 그림자이며 우리들 자신도 그림자” “중요한 것은 꿈일 뿐이고 우리가 살아가는 삶도 결국은 꿈의 내용이 현실이라는 흰 장막에 비치며 나타나는 신기루일 뿐”이란 식의 말을 불쑥불쑥 던진다. 수니가 배회하는 이 수용소에 대해 작가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가상공간인 수용소를 설정하면서, 굳이 이런 비현실적인 장소를 배경으로 등장시키는 것이 이 소설을 허공에 뜬 성처럼 보이게 하지 않을까 생각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 정도의 위험은 감수할 만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처럼 낯설고 새로운 방식으로 현실을 해체하면서 꿈과 현실, 삶과 죽음의 경계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질문들을 탐색한다. 작가는 2001년 이후부터 한국과 독일을 오가면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모국어를 낯설게 느끼게 하는 긴 관형절, 중문이나 복문 등은 그 영향으로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는 특별한 의미 부여는 하지 않았다.

“독일을 개인적으로 특별히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는다. 단지 한국에 작업실이 없는 내게 독일은 작업실 역할을 한다. 특히 베를린은 ‘글을 쓰기 위한 하나의 방’으로 머리에 각인돼 있다.” 그는 이번 베를린 체류 중에는 예전에 몽골을 방문한 경험을 살려 여행기를 쓰는 데 많은 시간을 들일 것 같다고 했다. “친구로 지내는 독일의 예술영화 감독이 촬영한 영화에 ‘아시아적인 상징을 띠는 인물’로 아주 잠깐 출연했는데, 신선하고 즐거운 작업이었다”라고 전하기도 했다.

“꿈을 가지고 책을 써보고 싶다는 소망을 얘기했지만, 이 소설이 그 결정판이거나 완성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작가로서 나는 앞으로 항상 그것을 위한 여정에 있게 될 것이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