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632년 스웨덴 구스타브왕 전사

  • 입력 2008년 11월 6일 02시 58분


1632년 11월 6일 독일 뤼첸, 구스타브 아돌프 스웨덴 왕은 평소처럼 선두에 나서 싸웠다. 하지만 이날은 그런 무모함의 대가를 치러야 했다. 너무 서둘러 말을 몰다 그만 호위병들과 떨어져 적진 깊숙이 와버렸던 것이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적군 머스킷병이 정조준 발사한 탄환이 구스타브의 왼쪽 팔을 관통했다. 타고 있던 말이 크게 놀라 제멋대로 달리는 바람에 구스타브는 적 기병대에 너무 가까이 접근하게 됐고 한 기병이 다시 그의 등을 향해 권총을 발사했다.

과거 전투에서 입은 어깨 총상 탓에 갑옷을 입지 않았던 구스타브에게 권총 탄환은 심각한 부상을 안겼다. 그는 안장에서 떨어졌고 한쪽 발이 등자에 걸린 채 말에 질질 끌려 다니다 간신히 몸을 비틀어 말에서 떨어졌다.

진흙에 고꾸라진 구스타브의 머리에는 세 번째 총탄이 관통했다. 한평생 전장을 누빈 영웅에게 너무나 비참한 최후였다. 더구나 적군 병사들은 그의 몸을 뒤져 셔츠까지 벗긴 뒤 시신을 진흙탕에 내버렸다.(맥스 부트의 ‘MADE IN WAR 전쟁이 만든 신세계’)

37세의 젊은 나이로 전장에서 산화한 ‘북방의 사자’ 구스타브 왕은 북유럽 변방의 척박한 동토(凍土) 스웨덴을 북유럽의 강대국으로 만든 인물이다.

속령 핀란드까지 합쳐도 인구가 130만 명이 넘지 않는 보잘것없는 나라의 왕에 오른 그는 재위 20년 동안 강력한 부국강병책을 추진했다. 조세 사법 교육 등 전반의 개혁을 단행해 근대 정부의 근간을 마련했다.

특히 군 지휘관으로서 보병과 기병, 포병, 군수를 한데 통합한 그는 역사에 ‘근대전의 아버지’로 기록됐다. 그는 육중한 야포를 표준화·경량화해 이동이 가능하게 하고 30열이던 밀집대형의 종심을 6열로 줄이는 등 기동성과 유연성을 강화했다.

이런 전술적 혁신에는 엄격한 군기와 철저한 훈련이 필요했다. 당시 대부분을 차지하던 용병들에게도 냉혹하리만큼 군율을 요구했다. 한 신하가 군법을 위반한 장교를 어떻게 처리할지 묻자 그의 답은 간단했다. “교수대가 없는가, 아니면 목재가 부족한가?”

이렇게 단련된 스웨덴군에는 막강한 위용을 자랑하던 스페인군도 맥을 추지 못했다. 신성로마제국과 가톨릭동맹에 맞서 30년 전쟁에 들어간 그는 전쟁의 판도를 뒤바꾸고 유럽의 프로테스탄트를 구원했다.

사후 구스타브는 스웨덴 왕가의 유일한 ‘대왕’ 칭호를 얻은 군주가 됐다. 훗날 나폴레옹은 율리우스 카이사르, 한니발, 알렉산더 대왕과 함께 그를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도자의 반열에 올려 추앙했다.

이철희 기자 klim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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