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79년 국회 YS 제명

  • 입력 2008년 10월 4일 03시 00분


1979년 10월 4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국회의사당에선 하루 종일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신민당 의원들은 국회 본회의장을 점거했다. 공화당과 유정회에서 김영삼(YS) 신민당 총재를 국회에서 제명하려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서였다. 여당 의원들은 오후 4시 정각 국회 1층 146호실에 속속 모여들었다. 날치기 통과를 위해 궁여지책으로 선택한 장소였다. 건장한 체격의 사복경찰 100여명이 회의장 주변을 에워쌌다. 오후 4시 7분 백두진 국회의장은 “국회법 158조 규정에 의해 김영삼 의원 징계동의안을 상정한다”고 선포했다. 투표 시작 10분 뒤 백 의장은 “재석 159명 가운데 가(可) 159표로 가결됐다”며 의사봉을 두드렸다.

신민당 의원들이 이 사실을 알고 달려갔지만 이미 늦었다. 헌정 사상 처음인 ‘국회의원 제명(除名) 1호’ 사건이었다.

YS는 제명 결정 직후 기자회견을 갖고 “공화당 정권은 오늘 국회를 권력의 시녀로 타락시켜 야당 총재를 의회로부터 추방하는 폭력정치의 하수인으로 만들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나는 잠시 살기 위해 영원히 죽는 길을 택하지 않고 잠시 죽는 것 같지만 영원히 살 길을 선택했다”라는 한국 정치사에 유명한 말을 이때 남긴다. 그는 신민당 의원들을 상대로 한 고별사에서는 “이 순간 내가 죽은 것이 아니다. 1969년 12월 20일 밤 김형욱이가 권력을 휘두르고 있을 때 나를 초산으로 암살하려 했다”면서 “민주투쟁을 향한 나의 의지와 생각을 이 정권이 빼앗을 방법은 없을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25세에 최연소 국회의원이 돼 7선(選)으로 최다선이었던 야당 당수, 누구보다도 의회주의 신봉자라고 자처하던 YS를 쫓아낸 국회.

발단은 뉴욕타임스와의 회견이었다. YS는 같은 해 9월 16일자에 게재된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미국 카터 정부는 박정희 정부에 대한 지지를 중단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많은 국민으로부터 점차 소외돼가는 현 정권과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절대 다수 중에서 명백한 선택을 해야 할 때가 왔다. 미국이 현 정권에 대해 공공연하고도 직접적인 압력을 가하는 것만이 박 대통령을 수중에 넣을 수 있다.” 서슬 퍼런 유신정권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쓴소리를 계속 하는 YS를 구속할 생각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명분이 뚜렷하지 않은 상태에서 구속할 경우 오히려 그를 국민적 영웅으로 만들 수도 있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는 “카터는 한국에 와 박 대통령의 위신을 높여줌으로써 반대 세력을 억압할 수 있는 용기를 그에게 줬다”고 비판했다. 유신독재 치하에선 용납되지 못할 발언이었다.

YS가 국회에서 쫓겨난 22일 후인 10월 26일 박 대통령은 서울 종로구 궁정동의 청와대 안가 만찬에서 최측근인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탄을 맞고 비명에 스러진다. YS가 29년 전 국회에서 제명된 날은 공교롭게도 부친 고(故) 김홍조 옹의 발인 날인 오늘과 겹친다.

최영해 기자 yhchoi6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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