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호 칼럼]아주 특별한 경기

  • 입력 2008년 9월 16일 03시 00분


세트스코어 0 대 3, 나의 완패였다. 휠체어를 탄 이영미(44·서울 구로구 고척1동) 씨는 무슨 벽 같았다. 왼쪽, 오른쪽, 어디를 공격해도 뚫리지 않았다. 하반신이 마비된 1급 지체장애인이라고 믿기 어려웠다. 스물다섯 살이 되던 해에 교통사고로 척수를 다친 그는 15년 동안 문밖출입을 않다가 탁구를 통해 다시 세상에 나왔다. 라켓을 쥔 지 4년, 탁구는 긴 어둠 끝에 찾은 새 삶이었다. 2.7g의 흰 공이 녹색 테이블 위에서 햇발처럼 튀었다.

문의배 탁구닷컴 대표가 “웬만한 아마추어는 휠체어를 탄 선수에게 못 이긴다”고 했을 때 설마 했다. 탁구라면 나도 조금은 자신이 있는데 아무려면 그럴까. 이쪽은 두 발로 자유롭게 움직이고, 저쪽은 휠체어를 타고 사실상 정지된 상태에서 공을 받아넘길 텐데 어떻게 내가 질 수 있나. 한번 붙어보고 싶었다. 체육부 기자 시절, 4년 넘게 탁구를 담당하면서 현장에서 보고 배운 것도 적지 않아 호기(豪氣)가 발동한 탓이리라.

베이징 장애인올림픽이 한창이던 10일, 나는 서울 양천구의 양천장애인복지관에서 이 씨와 경기를 가졌다. 이 씨는 복지관 탁구클럽회장인 서준형(55) 씨가 추천했다. 여자지만 전국장애인체육대회에서 금메달도 딴 실력파라고 했다.

이 씨의 표정은 밝았다. 소녀 같은 얼굴에선 시종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경기를 하기 전에 그는 오른손에 라켓을 쥐고 쥔 부위를 흰 붕대로 칭칭 감았다. 척추가 마비되면 손아귀의 쥐는 힘(악력)도 조절이 안 돼 경기 중에 라켓이 자주 빠져나가기 때문이라고 했다.

휠체어를 탄 선수에게 完敗

장애인 탁구경기는 서브가 엔드라인을 지나기 전에 양쪽 사이드라인을 벗어나면 안 된다. 그 밖에는 일반인 경기와 룰이 같다. 경기는 허망하게 끝났다. 3 대 11, 5 대 11, 7 대 11, 참패였다. 셰이크핸드 전형의 이 씨는 테이블에 바짝 붙어서 좀처럼 틈을 안 줬다. 왼쪽으로 오는 공은 중국 선수들의 전매특허인 백핸드푸시로 쳐냈고, 오른쪽 공은 라켓 앞면의 페인트 러버(이질 고무판)로 무회전(無回轉) 볼 등 다양한 변화구를 구사하며 반격했다.

속수무책이었다. 커트를 하면 공이 뜨고, 스매싱이나 드라이브를 하면 네트에 걸렸다. 대한탁구협회 사무국장을 지낸 최국원(60) 씨가 “다른 아마추어들처럼 이질 러버에 의한 변화구에 익숙하지 않은 데다 무회전 볼을 처리할 기술이 없었다”고 패인을 분석했다.

성이 차지 않은 나는 다른 장애인과 한 차례 경기를 더 했다. 갑자기 승부욕이 강하게 일었다. 상대가 누구이든 정말 이기고 싶었다.

그들과 나와의 ‘경계(境界)’는 그렇게 허물어졌다. 나는 단 한 세트라도 이겨보려고 최선을 다했고, 상대는 한 세트도 안 내주려고 애를 썼다. 내가 그들의 상처와 고통을 어찌 짐작이나 하랴마는, 우리는 비로소 하나가 된 느낌이었다. 스포츠는 모두를 하나로 묶는 힘이 있다지만 아주 특별한 경기였다. 서로의 마음에 쳐 보낸 탁구공이 하얗게 쌓였을 법했다.

베이징 올림픽이 끝난 직후 중국대사관의 한 관계자가 “앞으로 중국은 뭘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고 물어왔다. 나는 “장애인올림픽부터 잘 치르라”고 말해줬다. 일반 올림픽이 아무리 성공적이었다고 해도 장애인 선수 한 사람 한 사람을 얼마나 성심껏 보살피느냐에 따라 중국의 이미지가 좌우될 것이라는 얘기였다. 그러면서도 내심 부끄러웠다. 지금 우리가 그런 말을 할 처지인가.

탁구협회도 ‘境界허물기’ 동참을

탁구만 해도 그렇다. 이영미 씨가 아무리 잘해도 장애인올림픽에 그냥 나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국제대회에 자주 참가해 일정 수준의 점수를 따야 출전 자격이 생긴다. 국제대회에 한 번 나가는 비용은 평균 1000여만 원으로 개인이 부담하기에는 버겁다. 대안은 없는가. 우리가 국제대회를 유치하면 되지만 선뜻 나서주는 단체도 지자체도 없다.

대한탁구협회(회장 조양호)도 도울 수 있는 일이 많다. 어느 종목이나 장애인들의 경기 수준은 같은 종목의 일반인 경기 수준에 비례한다. 일반인 탁구가 세계 정상이면 장애인 탁구도 정상이라고 할 수 있다. 탁구협회가 기술지원팀을 만들어 장애인들을 틈틈이 지도해준다면 큰 힘이 될 것이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탁구대회가 열리는 경기장마다 관중으로 가득 차게 하자. 모든 종목이 그런 마음으로 경계를 허물면 그곳에서부터 차별은 사라진다.

잠시 우리를 하나가 되게 했던 베이징 장애인올림픽이 내일 막을 내린다.

이재호 논설실장 leejaeho@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