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40년 처칠 英총리 취임

  • 입력 2008년 5월 10일 02시 58분


“전쟁에서는 오직 한 번 죽지만 정치에서는 여러 번 죽는다.”

1940년 5월 10일 영국 총리(1940∼45년)가 된 윈스턴 처칠(1874∼1965)은 제2차 세계대전을 연합국의 승리로 이끈 주역 중 한 명으로 영국의 국민적 영웅이다.

주업(主業)이 정치가인 그의 프로필에는 ‘저술가’, ‘웅변가’라는 직함이 눈에 띈다.

그는 20여 편의 저술 중 특히 문장력이 돋보인다는 ‘제2차 세계대전 회고록’으로 1953년 노벨 문학상을 탔다. 정치가로서는 사상 처음이었다.

중절모를 쓴 채 시가를 물고 손가락으로 만든 ‘승리의 V자’가 트레이드마크인 그는 각종 연설에서 여러 명언을 남겼다.

“돈을 잃는 것은 적게 잃는 것이다. 그러나 명예를 잃는 것은 크게 잃는 것이다. 더 더욱 용기를 잃는 것은 전부를 잃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현재와 과거를 서로 경쟁시킨다면 반드시 미래를 놓치게 될 것이다.”

처칠은 2개월 먼저 태어난 조산아였다. 지능 발달이 또래보다 더뎠다. 이에 그의 아버지는 같은 문장을 몇 번씩 외우도록 교육시켰다. 그 덕택에 처칠은 영어의 기초를 완전히 습득할 수 있었고 그것이 나중에 저술활동과 명연설에 도움이 됐다고 한다.

웅변가로 유명한 그는 아이로니컬하게도 말할 때 혀가 꼬부라지는 신체적 핸디캡이 있었다. 결점을 교정하기 위해 처칠은 부단히 노력했고 즉석에서 말하는 것이 서툴렀던 그의 명연설들은 미리 원고를 써서 완전히 암기한 것이었다.

“포기하지 마라. 절대로 포기하지 마라.”

처칠이 옥스퍼드대 졸업식에서 한 이 짧은 두 문장의 축사는 유명하다. 처칠은 결코 포기를 모르는 정치가였다.

샌드허스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처칠은 1899년 7월 랭커셔의 올덤 보궐선거에 보수당 후보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1899년 11월 남아프리카전쟁(보어전쟁) 중 포로수용수를 탈출해 국민적 관심을 끌었다. 그는 대중적인 명성을 지지표로 연결해 재도전한 끝에 1900년 10월 올덤에서 하원의원으로 당선돼 정계에 진출하는 데 성공했다.

평생 열네 번 선거에 출마한 처칠은 두 번째 영국 총리(1951∼55년)를 지냈고 총리직을 사임한 후에도 계속해서 의원직을 유지했다. 1963년에는 미국 의회의 결의에 따라 명예 미국 시민이 됐다. 그리고 1965년 1월 24일 런던에서 타계했을 때 그의 장례식은 왕족을 제외하고는 최초로 국장으로 거행됐다.

안영식 기자 ysah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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