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555>卷六.동트기 전

  • 입력 2005년 9월 6일 03시 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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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한왕(漢王)께서는 성을 빼앗으시면 공을 세운 장수를 후(侯)로 봉하시고, 재물을 얻으면 바로 병사들에게 나누어 주십니다. 언제나 천하와 더불어 이익을 함께 하시니 영웅과 호걸, 현인(賢人)과 재사(才士)가 모두 한왕께 모여들어 기꺼이 부림을 받고자 합니다. 제후의 군대가 사방에서 한왕을 도우러 달려왔으며, 파촉과 한중의 곡식이 뱃머리를 나란히 하여 장강(長江)을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항왕(項王)은 어떻습니까? 약조를 저버리고 의제를 시해한 큰 죄가 있으면서도 사람을 부리는 데는 야박하고 인색하기 짝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세운 공은 기억하지 못하면서도 그가 지은 죄는 잊어버리는 일이 없고, 성을 떨어뜨린다 해도 봉토(封土)를 내리거나 재물을 나눠주는 법이 없습니다. 항씨(項氏) 일족이 아니면 결코 무겁게 쓰지 않으며, 어쩌다 장수들을 제후로 봉하려고 후인(侯印)을 새겨놓고도 내주기 아까워서 도장 모서리가 닳도록 가지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천하 사람들은 저마다 항왕에게 반기를 들고, 현인과 재사들은 그를 원망하여 아무도 그를 위해 일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천하의 인재들은 모두 한왕께로 돌아갈 것이며, 한왕께서는 힘들이지 않고 그들을 얻어 부릴 수 있었습니다. 이에 파촉 한중에서 군사를 일으켜 삼진(三秦)을 평정하셨고, 서하(西河)를 건너 위표(魏豹)를 사로잡고 상당(上黨)의 군대를 아우르셨습니다. 그런 다음 한신을 시켜 정형(井형)으로 치고 들어 조나라를 등에 업고 맞서는 성안군(成安君) 진여를 지수((저,지,치)水)가에서 목 베었습니다. 북위(北魏)를 쳐부수시고 서른두 개의 성을 떨어뜨리셨으며, 그 밖에 한왕의 위엄에 눌려 스스로 항복해온 성은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이는 실로 치우(蚩尤)의 군사들이 보여준 기세와도 같은 것으로, 사람의 힘이라기보다는 하늘이 내리신 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거기다가 지금 한왕께서는 이미 오창(敖倉)의 곡식을 차지하셨으며, 성고의 요해(要害)를 막고 계십니다. 백마(白馬) 나루를 지키면서 태행산(太行山)으로 드는 길목을 끊고, 아울러 비호(蜚狐)의 목줄기를 틀어쥐고 계십니다. 따라서 천하의 제후들 가운데 뒤늦게 한왕께 항복하는 제후는 그만큼 남보다 먼저 망해 없어지게 될 것입니다. 왕께서도 서둘러 우리 대왕께 항복하신다면 제나라를 보전하실 수 있을 것이나, 굳이 항복을 마다하시면 앉아서 제나라가 망하는 날을 기다리시게 될 것입니다.”

제왕 전광(田廣)이 결코 기백이 모자라는 사람이 아니었으나 거기까지 듣자 섬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얼른 보기에는 언제나 패왕 항우 쪽이 우세해 보였으나, 역이기가 하나하나 짚어가며 하는 말을 듣고 보니 대세가 한왕 유방 쪽에 있다는 말이 모두 옳게 들렸다. 역이기를 내보내고 가만히 재상 전횡(田橫)과 의논했다.

“저 사람의 말이 아무래도 세객(說客)의 속임수 같지는 않은 듯하오. 어찌하면 좋겠소?”

싸움터에서는 물불 가리지 않는 맹장이었으나, 전횡에게도 역이기의 말을 알아들을 만한 귀는 있었다. 어렵게 패왕 항우를 물리치기는 해도 그와 다시 싸울 생각을 하니 으스스해 한왕과 손잡고 맞서는 쪽을 골랐다.

이에 전광은 한나라에 사신을 보내 화평을 맺기로 하는 한편 20만 대군으로 역하(歷下)를 지키고 있는 전해(田解)와 화무상(華無傷)에게도 사람을 보내 그 일을 알리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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