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494>卷六. 동트기 전

  • 입력 2005년 6월 27일 03시 1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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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한편 그런 기신의 죽음을 보고 있는 패왕 항우는 까닭 모를 분노와 모욕감으로 속이 터질 것만 같았다. 나름의 자부심과 자신감으로 꽉 차있는 패왕으로서는 기신이나 주가를 지배하고 있는 감정을 쉽게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무엇이든 실용적인 것만 높이 치고 몸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만 믿는 패왕에게 아직 제도로 정착하지 못한 유가적 이념미(理念美)는 기껏해야 어쩔 수 없는 책상물림의 환상이거나 홀림으로만 여겨졌다.

‘무슨 선비의 정신이 저같이 나약하고 비루한가. 주인이 무엇이며, 임금은 또 무엇이기에 저토록 자신을 하찮게 내던진다는 것이냐. 아무리 주인으로 정하고 임금으로 섬기게 되었다고는 하지만, 저 천박하고 비굴한 장돌뱅이 유방 놈 그 어디에 목숨까지 던져가며 받들 무엇이 있다는 것이냐. 더군다나 감히 나를 거슬러가며….

나는 온 나라 사람들이 우러르는 명문가의 후예이며, 그 안타까운 죽음 때문에 전설로 되살아나기까지 한 명장 항연(項燕)의 손자이다. 또 숙부 무신군과 더불어 진나라에 맞서 일어난 뒤로는 한번도 싸움에 진 적이 없었고, 이제는 천하를 호령하는 패왕이다. 그런데 마흔이 넘도록 노름꾼 주정뱅이에 좀도둑 떼의 우두머리 노릇이나 하다가 풍운에 떼밀려 현령으로 출발한 저 허풍선이 유방을 위해 나에게 감히 맞서려 하다니….‘

한왕 유방이 성을 빠져 나간 뒤로 사흘 밤낮, 패왕으로 하여금 전군을 들어 형양성을 공격하게 만든 것은 아마도 그런 느낌에서 비롯된 그 까닭 모를 분노와 모욕감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한왕은 겨우 몇십 기(騎)만 이끌고 빠져나가 성안의 전력(戰力)은 크게 줄지 않은 데다, 성을 맡아 지키기로 한 장수들의 각오와 결의도 한창 날카로운 기세로 변해 있었다. 주가와 종공이 한왕(韓王) 신(信)과 더불어 남은 장수들의 기운을 북돋우고, 성안의 물자와 군민을 모두 성벽 위로 끌어내어 죽기로 싸우니, 형양성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거기다가 성고(成皐)에서 날아온 소식이 패왕을 맥 빠지게 했다.

“어젯밤 한왕 유방이 성고성을 버리고 관중으로 달아났습니다.”

그 말을 듣자 패왕은 바로 대군을 내어 한왕을 뒤쫓지 않은 게 한스럽기 짝이 없었다. 기신의 말만 믿고 제 분에 못 이겨 펄펄 뛰는 사이에 한왕은 유유히 제 소혈로 돌아가 똬리를 틀고 앉은 셈이었다. 형양성을 치는 일도 더는 무리를 할 수 없었다.

“좋다. 군사를 거두어라. 며칠 더 굶주리고 지치기를 기다려 다시 형양성을 치자.”

성은 떨어질 기색이 없는데 군사들만 상하자 마침내 패왕이 그렇게 명을 내려 공격을 멈추었다. 그리고 물샐틈없이 성을 에워싸게 해 쌀 한 톨 군사 한 명 성안에 들지 못하게 막고 나니 다시 궁금증이 일었다.

‘불에 타 죽은 기신뿐만 아니라 가망 없는 성안에서 저토록 완강하게 버티는 저들이 기대고 있는 것은 또 무엇일까. 내 듣기로 유방은 무례하고 오만하여 마음 내키는 대로 선비들을 모욕하기 때문에 절개 있는 선비들은 그를 찾아가지 않는다고 했다. 다만 저잣거리 장사치들에게서 배운 더러운 술법으로 땅과 재물을 아낌없이 내려 탐욕스러운 무리의 환심을 살 뿐이라고 들었다. 그런데 지금 저들이 보여주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아무래도 땅과 재물에 팔린 무리들이 할 수 있는 짓 같지가 않구나. 도대체 그 엉큼하고 능글맞은 장돌뱅이가 저들에게 무슨 짓을 한 것일까.’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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