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론마당/이태복]의료산업을 국가전략산업으로

  • 입력 2005년 3월 14일 18시 2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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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도하개발어젠다(DDA) 이후 의료시장 개방이 불가피하다는 말은 많지만 후속 대책이 제대로 나오지 않고 있다. 쌀 시장 개방과 닮은꼴이다. 앞으로 닥칠 사태가 훤히 보이는데도 이해집단의 눈치를 보며 세월을 보내고 있다. 시간을 놓치면 국민이 그 부작용을 고스란히 뒤집어쓰게 된다. 그렇다고 이해관계자의 이익이 보장되는 것도 아니다. 결국 외국의 요구대로 백기 항복하는 것으로 귀결될 뿐이다.

이익단체들이 반대하는 것은 당연하다. 자신들의 피해가 예상되는데 찬성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문제는 정부다. 국가 차원의 전략과 국익을 고려해 장단기적 대책을 세워 이익단체와 국민을 설득해 문제를 풀어 가는 진지한 노력이 필요한데 이 작업이 제대로 되고 있지 않는 것이다.

국내 의료계는 시장 개방 문제도 있지만 질병 치료와 관리, 예방을 위한 제도 등에 관한 국민의 불만이 폭발 일보 직전이다. 의료비 부담은 갈수록 늘지만 ‘3분 진료’라는 한심한 현실은 개선되지 않고 있고 담당 의사의 처방 이외에 다른 방법은 없는지 아무도 설명해 주지 않는다. 새로운 치료 기술이나 각종 기구들이 개발되고 있는데 관련 법규나 제도는 ‘과거의 예’에서 벗어나는 법이 없다.

정부가 시급히 해야 할 일은 자명하다. 우선 의료산업을 국가전략산업 차원에서 발전시키는 전략을 추진해야 한다. 공급자 중심의 시스템을 공급과 수요의 균형을 기할 수 있는 시스템으로 바꾸는 일 말고도 표준 진료 지침 제정, 양방과 한방의 상생, 신의료기술의 적극 인정, 공공 의료와 환자의 알권리 보장 강화 등 해야 할 과제들이 산처럼 쌓여 있다.

의료시장 내의 공정한 경쟁구도를 만들어야 한다. 인구 13억 명의 중국 시장은 현재 우리보다 서양 의료기술이 5년가량 뒤져 있다. 최근에 급속한 발전을 이루고 있지만, 우리의 대처 여하에 따라서 한국 의료시장은 가능성을 넓힐 수 있다. 하지만 현재의 실정으로는 오히려 조만간 뒤처지고 말 것이다.

의료시장을 정상화해 시장 개방에 대비해야 한다. 병의원의 활동을 비영리사업으로 규정하는 비현실적인 굴레를 벗겨 줘야 한다. 영리와 비영리를 구분하고 각기 그 소임을 다할 수 있도록 틀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모든 병의원, 한의원, 약국 등을 건강보험체계에 강제 가입시키는 제도는 건보 운영의 합리성을 제약하는 편의주의적 사고의 산물이다. 민간 병의원의 건보 강제 적용 규정을 폐지하는 대신 가입 사업장에 대한 관리와 감독을 엄격히 해야 한다. 약품과 한약재, 의료용구의 가격 질서도 부끄러운 수준이고 유통 과정의 부조리도 많다. 공정하고 투명한 틀이 만들어져야 한다.

의료산업을 국가전략산업으로 육성하겠다는 관점이 없으면 연간 수조 원의 의료비 해외 유출이 지속될 뿐 아니라 외국 의료산업의 한국 시장 지배도 강화될 것이다. 첨단 신기술로 무장한 외국 병원들이 한국에 대해 의료시장 개방을 줄기차게 요구하는 것은 한국 의료시장의 낡은 제도와 성장 가능성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략적 관점에서 의료 인력 양성 프로젝트나 세계적 경쟁력을 갖춘 질환별 병원의 육성, 낡은 법과 제도의 개혁, 바이오산업과의 결합 등을 추진해야 한다.

우리가 준비 없이 시간만 허비하고 만다면 제약시장을 다국적 제약사들에게 내준 데 이어 의료시장마저 그들의 차지로 끝나고 말 것이다.

이태복 전 보건복지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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