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자비]<27>마음의 평화

  • 입력 2003년 8월 22일 17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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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 달 안거를 마치고 행각 중인 도반의 전화를 받았다. 곧 들르겠다는 도반의 음성은 맑은 여운을 남겼다. 나는 문득 댓돌 위에 가지런히 놓인 하얀 고무신과 입선을 알리는 죽비 소리가 그리웠다.

신을 벗을 때마다 가지런히 벗었는지 뒤돌아보던 그때는 마음도 참 단정했다는 생각이 든다. 조고각하(照顧脚下)라고 쓰인 기둥의 글씨를 볼 때마다 발밑을 살피듯이 마음 또한 살폈다. 잘 정돈된 신처럼 단정하게, 그리고 희디흰 고무신처럼 순결하게 마음을 갖고자 노력했던 그 시절은 마음의 평화를 만날 수 있어 좋았다.

입선을 알리는 죽비소리에 대한 기억도 또렷이 남아 있다. 탁, 탁, 탁. 입선을 알리는 죽비소리는 너무 맑아 세상의 어떤 어둠과 더러움도 모두 흩어버릴 것만 같았다.

그 소리는 혼침에 빠지지 말고 성성하게 화두를 들라는 가르침이었다.

여음을 남기지 않는 죽비소리는 또한 수행자는 어떠한 집착도 없이 담백하게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듯했다.

마음이 평화로웠던 그 시절 나는 모든 것을 아름답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누구의 칭찬이나 비난에도 마음을 빼앗기지 않았다.

작고 사소한 것들까지도 아름다움의 의미로 다가와 내게 행복을 일깨워 주었다. 그러나 그때의 그 마음이 지금 내게는 없다.

우리 삶의 모든 내용은 마음을 떠나지 않는다. 지금 내가 누군가를 미워하고 있다면 내 마음에 분별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분노하고 있다면 내 마음에 집착이 있기 때문이다. 타인을 향한 미움과 분노는 내 마음 속의 집착과 분별의 다른 이름이다.

“나는 중생을 보아도 중생이라는 분별을 내지 않으니 지혜의 눈으로 보기 때문이다. 온갖 말을 들어도 말이란 분별을 내지 않으니 마음에 집착이 없기 때문이다.” 화엄경의 이 말씀은 마음의 평화에 이르는 길을 일러준다.

대상에 집착하면 지혜를 잃는다. 진정 평화롭고 싶다면 마음을 볼 일이다. 내 마음의 평화만이 이 세상 모든 존재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만나게 할 것이다.

성전 스님 월간 해인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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