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 삶]안철환/"죽어서 좋은 흙이 되고 싶다"

  • 입력 2003년 3월 28일 18시 5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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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름을 피우다 더 이상 양심이 허락지 않아 오랜만에 콩밭에 가보았더니 콩보다 풀들이 더 무성하다. 밭을 기어다니며 밑동만 보고 정신 없이 풀을 골라 매다가, 비 오듯 쏟아지는 땀과 찌는 무더위에 지쳐 잠시 숨을 고르려 하늘을 쳐다보니 노란 하늘 끝에 뭔가 예사롭지 않은 게 퍼뜩 눈에 들어온다.

가물가물한 눈을 가다듬고 자세히 쳐다보니 기다란 풀 끝에 벌레 하나가 매달려 있다. 바로 앞에서 풀을 매는 사람이 있는데도 꼼짝 않기에 다가가 보니 죽어 있는 모습이다. 한데, 그냥 죽어있는 게 아니라 몸의 반은 다른 벌레가 먹었는지 반만 남아 있다.

▼자연으로 돌아가는 인간생명 ▼

손가락만 한 방아깨비인데, 풀을 두 팔로 부여잡고 정면을 응시하며 죽어 있는 모습이 참으로 의연하다. 죽은 지 며칠 지났는지 모르지만 반만 남은 윗부분도 거의 삭아서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바싹 부서질 것 같다.

정신 없이 풀을 매다 하필 그 순간에 방아깨비가 달려 있는 풀 앞에서 일을 멈춘 것을 보면 그 놈과 과거에 뭔가 인연이 있었을 법하다. 하여튼 그 놈의 죽은 모습은 고승(高僧)들의 의연한 입적(入寂)과 아주 흡사한 것으로 여겨졌다.

속세의 인간들은 죽음 앞에서 너무나 초라하기만 하다. 어디 그뿐이랴. 어떤 점에서는 구차하기까지 하지 않은가.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하고 죽음 앞에서 그것을 거부하려 아등바등한다. ‘벽에 똥칠한다’는 말처럼 대개는 죽음에 직면하게 되면 스스로의 몸을 돌볼 여력조차 잃어버린다.

죽음을 어떻게 하면 피할 수 있을까 고민하며 노심초사하고, 또 한편에선 이것저것 많은 약들에 의지해 나머지 목숨을 부지해 간다. 하지만 인간은 암이다, 고혈압이다, 중풍이다, 당뇨병이다 하는 많은 병을 끌어안고 죽음을 맞이한다. 그러니 죽는 순간의 모습이란 차마 남에게 보이기 싫을 수밖에 없다. 이미 만신창이가 된 몸에서 의연한 자세가 나올 수는 없는 것이다.

내가 아는 한 귀농 선배는, 농사지은 지 7, 8년이 지나니 인생의 목표가 뚜렷이 서더란다.

“학생운동, 노동운동 등으로 젊은 시절을 보내고 이제야 흙과 함께 살다보니 그 시절 꿈꿨던 목표보다 더 뚜렷한 비전이 절로 생깁디다.”

“…?”

“죽어서 좋은 흙이 되는 것이지요. 이게 목표라니 이해할 수 있겠어요?”

‘좋은 흙이 된다’, 언뜻 고개가 갸웃거려졌지만 조금 생각해보니 참으로 해탈한 방아깨비의 죽음과 같은 얘기가 아닐 수 없다.

언젠가 한 초상집에 같이 간 선배는 내게 이런 말을 던져주었다. “철환아, 내가 죽으면 내 몸을 닭모이로나 주어라.” 티베트의 조장(鳥葬) 얘기다. 티베트에선 사람이 죽으면 도끼로 뼈와 살을 잘 발라내 독수리의 먹이로 준다. 살아 생전 신세진 뭇 생명들에 대한 빚 갚음이기도 하고, 그들의 먹이가 됨으로써 좋은 흙으로 돌아가는 순환의 삶을 이어가는 것이다. 비록 TV이기는 하지만 죽은 자의 뼈를 가르는 염장이의 눈빛에선 저승사자의 살기를 전혀 느낄 수 없었다. 화면으로만 보아도 그 눈빛은 너무나 평화롭고 안온하기만 했다. 바로 옆 오랜 수행을 거친 큰절 주지스님의 눈빛과 하등 다를 바 없으니 그 또한 신비롭기만 했다.

문명세계의 인간이란 죽어서 결코 좋은 흙이 되기 힘들다. 화학약품에 찌들고 대소변도 스스로 가릴 수 없는 건강하지 못한 몸이 어떻게 좋은 흙이 될 수 있겠는가. 오히려 흙을 오염시킬 뿐.

좋은 흙이 되겠다던 그 귀농 선배는 요즘 자신이 직접 만든 재래식 화장실도 쓰질 않는다고 한다. 이른 새벽에 일어나 물 한 바가지와 호미 한 자루만 들고서 자기 밭 적당한 곳에 구멍을 파 일을 보고 물로 밑을 닦으면 그만이다. 표백제로 화학처리한 화장지를 쓰지 않으니 건강에 좋고 화장실에 모아둔 똥을 힘들여 밭에 뿌리지 않아도 되니 편리할 뿐이란다.

▼죽은 방아깨비 보고 깨달아 ▼

그 흙에서 난 것으로 배를 채우고 남은 것은 다시 흙으로 돌려보내니 일상의 모든 삶이 흙에서 왔다 흙으로 돌아가는 순환의 삶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죽어서 좋은 흙으로 돌아가려는 목표는 억지로 노력하지 않아도 절로 이뤄지는 자연스러운 일일 뿐이니, 굳이 목표라는 말을 쓸 필요도 없다. 방아깨비가 일부러 도를 닦아 해탈하려 하지 않아도 절로 그렇게 되는 것처럼.

▼약력 ▼

1962년생. 서강대 물리학과 중퇴. 94년부터 소나무출판사에서 기획실장으로 근무하며 자연과 농사에 관한 책을 만들었다. 지금은 ㈔전국귀농운동본부에서 농사 및 생태 관련 출판일을 맡고 있으며 경기 안산시에서 밭 두 마지기를 스스로 갈면서 각종 채소와 잡곡 농사를 짓고 있다.

안철환 전국귀농운동본부 출판기획실장·농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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